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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24. 2018

8 <가수는 입을 다무네> 발제문

*느빌의 책방에서는 "시스템-개인"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가수는 입을 다무네>은 앞으로 이어질 "예술" 3부작 중 두 번째 텍스트입니다.



# 발제를 넘어오며


저번 시간, 우리는 <시대의 소음>에서 거대 정치권력에 쌓인 한 음악가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대체역사 소설인 만큼 실제로 쇼스타코비치가 그런 생각을 했겠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예술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미디어를 거치며 마치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처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귀가 있는 자여 들어라.”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음악이 누군가에게는 만들어진 때에 시기적절하게 들리길 바랐다.

이처럼 예술은 시대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태어난다. 악기의 발달과 기술의 발달을 차치하더라도 음악 역시 다른 예술의 종목-건축이나 미술-처럼 변화해왔다. 내가 <시대의 소음>에서 주목했던 문장 중 하나는 ‘작곡가는 사라지지만 음악은 영원히 남는다.’였다. 언뜻 들으면 작곡가가 죽어도 그가 만든 음악은 대를 이어 남겨질 것이라는 뜻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음악으로서 명예와 지위를 획득하고 싶은 음악가로서는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자신의 음악이 인정받기를 가장 간절히 원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다음 책을 골랐다. 그러다 한 책이 눈에 띄었다. 고인이 된 정미경의 유작 소설이라는 <가수는 입을 다무네>였다. 소설은 마지막 학기에 장학금과 취업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찍는 여대생 이경과 이경의 피사체가 되는,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가수 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한 물간 예술가, 그리고 그의 오만


아재들이 많이 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다. “내가 예전에는 말이야~” 혹은 “내가 네 나이였으면~”.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하지만 과거는 특히 미화되기 마련이며, 사람들은 그런 과거의 특성에 감성적으로 빠지곤 한다. 주인공인 율역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인기 밴드 ‘무무’의 리더였지만 목소리가 ‘사라졌다’고느끼고 십 년이 넘게 일종의 조울증 상태에 놓인 채 방에 틀어박힌 사람이다. 이경이 다큐멘터리 촬영을 진행하지만 율의 태도는 제멋대로다. 그리고 자신이 밴드 활동을 할 때 데리고 다니던 호영이 앨범을 준비하지 만 거기에 대해서는 악담만 늘어놓을 뿐이다.

시대가 예술을 가두어 놓는 경우도 있지만 ‘율’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면 지금도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는 그의 생각은 오만이다. 자기 자신만의 음악을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율은 자신의 음악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율에겐 자신의 노래 외엔 모든 것이 소음이며 쓰레기였다.”


하지만 율이 정말 자신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노래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율에게는 두려움 역시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자신이 굳게 믿는 ‘내음악은 최고야. 모두가 들으면 빠져버릴 수밖에 없을 걸’라는 신념이 있다. 하지만 진짜로 컴백을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다면? 그의 신념은 무참히 깨지며 그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동시에 인기까지 누리는 것은 타이밍과 운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이해하고 현재에서는 조금 겸손함을 가지고 시대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갈 길-자신만의 음악을 고수한다/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든다.-을 정하는 것이 급박하게 변해가는 맞는 것이 아닐까. 물론, 둘 다 되면 좋고.



# 다큐멘터리, 그리고 피사체


이번엔 이경이 이야기다. 그녀는 혼자다. 그러나 졸업과제를 위해 율을 다큐멘터리에 담으며 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현수와 현수를 통해 알게 된 호영. 그리고 율의 연인인 여혜까지. 특히 여 혜는 이런 말을 이경에게 건넨다.


“이경 씨, 나는 그래. 피사체를 변형시키지 못한 다큐는 실패한 다큐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는 일도 매 순간 연출이고 연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완전히 리얼을 추구할 것인지. 약간의 유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것인지. 완전한 리얼은 기록자가 카메라 앞의 대상에 개입하지 않으며 최소한의 촬영 장비로 결정적 순간을 무한정 기다리는 '디렉트 시네마'. 약간의 유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 '베리테'는 피사체와 기록자의 상호작용을 허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율’ 을 주제로 담은 다큐는 베리테였으며, 여혜의 의견처럼 '율'이 이경을 통해 앨범을 내리고 결심하고 변형이 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경은 이 성공한 다큐멘터리를 학교 과제에도, 큰 상금이 걸린 곳에도 제출하지 않는다. 그녀가 과제로 제출한 건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만난, 어디에서 사는지 알 수 없던 엄마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부분은 그녀가 엄마와 있을 때다. 다큐의 갈래로 따진다면 일말의 개입도 없는 '다이렉트 시네마'였던 것이다. 

소설의 내용 자체도 ‘율’과 그 주위를 베리테처럼 보인다. 과제를 끝나고 율의 죽음 후 현실로 돌아온 이경이 있는 곳은 가장 현실 같은 엄마와의 공간이었다. 담담하게 엄마의 요리를 평가하며 끝나는 장면이 오히려 가장 좋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피사체를 찍던 이경이 삶이라는 다큐에서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베리테보다는 다이렉트 시네마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에 개입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고,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알맞은 것은 의도적인 개입이 없는 한도에서의 자연스러운 날 것 그대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가수는 입을 다무네>에서는 아쉬운 장면이 많이 보인다. 20대 대학생인 이경은 어딘가 모르게 기성세대가 바라본 모습이다. 힘들게 공부를 하며 알바를 하며 학비를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학생들은 모두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에 묶여있다. 알바를 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다. 소설의 시점은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서사의 진행 역시 정방향인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섞여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리고 ‘율’이 말하는 것들은 가끔 너무 감정적이라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굳이?’라는 반응을 가져온다. 소설을 읽으며 공감이 잘 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한 물 간 가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소설이 그 소설 자체로도 한 물 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후에 나는 <가수는 입을 다무네> 가 고인이 퇴고를 거치지 않은 원고 상태로 발견된 것을 출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생전의 소설가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과거에 그가 남긴 모든 것을 사랑하고 기억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창작은 세상에 나오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친다. 초고를 쓰고 퇴고를 쓰고 계속해서 수정한다. 그래서 나는 <가수는 입을 다무네>가 아쉽다. 하지만 글을 쓴 작가는 이미 이 자리에 없다. 

어쩌면 이 소설은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개입하여 발표한 '베리테'같은 소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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