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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Feb 19. 2018

13. 디스토피아와 그 평범한 공모자들

<꿈의 궁전> - 이스마일 카다레


     

1. 도시에서 디스토피아로

     

 최근의 세 모임동안 도시를 주제로 총 세권의 책을 읽었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 <립반윙클의 신부>, <한국이 싫어서> 이 세 권의 공통점은 도시가 살만하지 않다는 것. 현대사회엔 문제가 너무 많다는 것. 특히 한국은 답이 없다는 것까지...... 이런 살기 뭣 같은 세상에서 책은 읽어서 뭐하냐. 그러나 친절하게도 문학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위안거리를 찾아준다. 바로 더 나쁜 상황을 가정하는 것. 보란듯이 심각한 세상을 꾸며내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공포와 함게) 이런 현대사회의 부정성, 어째서 사회는 이렇게 힘든가를 집요하게 묘사해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소설들이 있다. 이름하야 디스토피아 소설.

     

  

디스토피아를 다룬 다양한 작품들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극대화 되어 나타나는 어두운 미래상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전체주의적인 정부에 의해 억압받고 통제받는 가상사회를 말한다.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감시가 더욱 공고화되는 사회, 극단적인 환경오염으로 생태계가 파괴된 사회, 기계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회, 핵전쟁이나 환경재해로 인해 모든 인류가 멸망하는 사회 등이 디스토피아에 해당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디스토피아의 정의는 위와 같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조지 오엘의 <1984>,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러시아 소설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미아친의 <우리들>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에 더해 <시계태엽 오렌지>라던가 그 예는 얼마든지 있다. 도시에서 부정성을 발견했다면, 디스토피아를 떠올리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 어른들이 아이들보면 “요즘 아이들은 쯧쯧..” 이러는 것도 다 아이들의 행위에서 디스토피아를 또올렸기 때문이다. (잘은 모름) 그러나 디스토피아가 미래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강화됏던 시기가 존재했다. 에를 들면 아우슈비츠 같은 상황들 말이다.

     

     

2. 꿈의 궁전

     

꿈의 궁전은 일반인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면서 동시에 공포를 느끼게 한다


  꿈의 궁전은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쓴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현재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번역되어 있는데, 알바니아어의 사정상 아쉽게도 직역이 아닌 중역이다. 작품은 19세기 말 오즈만 투르크 제국을 배경으로,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역인 꿈을 감시하는 기관 꿈의 궁전을 주제로 한다. 이 책의 탄생에는 알바니아의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알바니아는 1400 년대에 오즈만 투르크에 복속되어 20세기 초에 독립하였고, 그 뒤로는 공산정권이 90년대 초까지 있었다. 이러한 알바니아의 역사적 배경이 디스토피아 소설의 탄생을 부추긴 것이다.


  작품 속 꿈의 궁전은 꿈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미로 같은 건물구조며, 직무로만 불리는 사람들은 마치 카프카의 소설들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동시에 작가는 뜨문뜨문 드러나는 구체성(업무, 길 찾기, 대화 등등...)을 통해 작품 속 환상과 현실의 균형을 맞추어 환상적인 세계를 현실에 끌고 온다. 이런 분위기는 자칫하면 면 이질적인 두 세계 속에서 길을 잃고 특색을 이를 수 있는데 작가가 완급조절을 잘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대비되는 분위기는 쿠플릴리가와 꿈의 궁전 그리고 현실과 꿈의 대립을 암시하기도 한다.




3. 디스토피아의 탄생

     

  꿈을 감시하는 궁전 속 업무는 한 마디로 꿈을 해석하는 일이다. 꿈의 궁전에 관련된 모든 조직들은 아무리 하찮은 부서라 하더라도 기본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각 지역마다 설치된 꿈 수집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꿈을 어느 정도 판단해야 작업이 가능할 정도. 주인공은 세도가 집안이라 그런지, 처음치곤 높은 위치인 선별부에서부터 커리어를 시작한다. (금수저) 그 후 점차로 해석의 범위가 넓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꿈이란 전적으로 무의식에 관련된 것. 과연 어떤 의미를 그 속에서 추출한단 말인가?


     

카다레의 디스토피아 속에선 꿈마저 검열 당한다



“······장담컨대 그들은 결코 그 꿈들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숨겨진 의미를 찾는답시고 쓸데없이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할 뿐이지. 실상 그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집안 걱정이나 월급 불평 또는 내가 모르는 기타 다른 일들로 복잡할 거야.······“

     

  게다가 이들의 업무 방식은 꿈 속 이야기에 상징을 주먹구구식으로 끼워 넣는 비과학적 방식. 애초에 정답을 맞히는 것은 불가능한 업무다. 꿈은 너무나도 내밀한 영역이다. 따라서 완벽한 해석은 실상 불가능에 가까우며 왜곡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들은 왜곡을 하면서 자신의 의견 해석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오해를 걱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의견이 한 순간에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직원들은 어쩔 수 없이 죄의식을 지니게 된다. 꿈의 궁전 직원들은 이렇게 책임을 나누어 가지며 공모자가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느끼며 그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문서에 고개를 떨구었다. 53p

     

  공모자들이 갖는 죄의식은 특히 쿠프릴리 가문과 연관이 깊다. 그들은 다리를 지으면서 권세를 얻게 됐고, 그 과정에 살인을 저질럿다. 시초부터 범죄를 저지른 집안이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죄의식은 쿠르트 삼촌이 참수를 당하면서 심화된다. 그러나 삼촌의 죽음이 마르크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굼의 궁전이라는 시스템 하에선 자신의 책임을 취사선택할 수 없엇을 분이다. 이 감정은 더 나아가 전 국민이 나눠 갖게 된다.

     

  “내 생각은 이래. 타비르는 제국의 기관들 가운데 백성들의 잠재된 의식의 일부가 제국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라는 거지.”

  그는 자신이 한 말의 반향을 살피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러곤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일반 백성들이 나라를 다스리진 않아. 하지만 그들에게는 제국의 흥망을 좌우하고 대역죄와 결부된 모든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이 존재하지. 그 기관이 타비르 사라일이야.”

  “그러니까 백성들이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총체적 책임 같은 것을 지니며 따라서 죄책감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86p

     

  직원들이 회사의 일에 책임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 꿈의 궁전이라는 시스템이 검열의 책임을 온 국민이 분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시스템은 국민들에게 국가적 사태에 대한 공포와 위기의식을 고취시켜 그들 스스로 시스템에 참여하는 자발적인 피검열자가 되도록 부추긴다. 국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내밀한 부분들을 검열하지만 동시에 자발적이라는 환상도 갖게 되고, 국민들이 스스로 행한 검열 덕분에 사람들은 각자가 죄의식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 과정 속에서 꿈의 궁전은 국민들을 공모자로 만든다. 이렇게 개개인의 내밀한 부분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카다레의 디스토피아는 탄생한다.


  그러나 주인공 마르크가 확인한 디스토피아의 실체는 허망하다. 그가 국장 대리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이 시스템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 이 시스템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도 없고, 그 운영하는 주체도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눈에는 시스템이 지닌 허황된 모습만이 자명해질 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를 짓누르는 수수께끼 같은 일과 질식 할 듯한 분위기에 그렇게 불안해했는데, 지금은 그가 그러한 수수께끼와 불안감을 조성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터져나오려는 실소를 참기 어려웠다. 279p

     

  꿈의 궁전은 여타 디스토피아와 다르게 누군가의 세심한 관리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궁전은 이제 하나의 시스템으로 스스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권력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죄의식은 그들이 권력의 메커니즘에 들어서는 순간 공모자의 역할을 받아들이면서 갖게 된다. 일반 사람들의 권력에 대한 태도가 다시 무의식에 반영되고, 권력은 꿈을 해석하는 순환구조를 만든다. 꿈의 궁전은 다른 디스토피아와 다르게 개인과 시스템의 상호작용을 기본으로 한다.

     

  다른 사람의 꿈속에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과 그들이 어떤 베일에 싸인 마차를 타고 다니느냐 하는 것, 그리고 그 마차를 장식하고 있는 문장이나 상징이 얼마나 신비한 것인가 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285-286p

     

  카페에서 마르크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 하며, 눈을 뺏긴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사회에 억압받은 피해자이지만 그 상징을 자랑스레 보이는 자부심잇는 공모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공모자로서의 태도가 디스토피아를 공고히 한다. 디스토피아는 오히려 피해자들을 통해 재생산되고 확실해진다.

     


     

3. 해석에 반대한다.

     

  외삼촌 쿠르트의 계획은 ‘알바니아 무훈시니 알바니아어로 들어보자.‘ 였다. 여기서 꿈과 무훈시의 대비가 이루어지는 데, 둘의 형식은 상당히 비슷하다. 둘 다 상징으로 가득한 이야기의 형식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하나는 공개적으로 말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밀하게 검열되는 것이다. 마르크는 무훈시를 들을수록 점차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간다. 결국 외삼촌은 이 사건으로 참수당하지만, 마르크는 결말에 이르러 꿈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이제 소설이 끝나고 작가와 독자 모두 현실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작품을 읽고 남은 의미는 알바니아의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작중 알바니아는 제국에 병합되어 오랜 기간 지배받아왔다. 이 당시는 알바니아가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10-20년 전인 독립에 가까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이야기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서명을 한 1981년의 경우 공산주의 정권의 강압에 알바니아 민족성이 위협을 느끼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두 시기 모두 알바니아가 실체가 없는 것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것. (무서워하기 때문에 무서워지는 꿈의 궁전을 생각하면 작가가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생각했는지, 냉전 상황을 평가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꿈이라는 무의식은 디스토피아의 재생산에만 도움이 될 분이다. 알바니아에 필요한 것은 현상에 대한 무의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의식적인 발언이 필요하다. 실상 꿈과 무훈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둘이 받아들여지는 형식은 커다란 차이가 잇다. 열린공간에서 대화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면 페쇄된 공간에서 해석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의 차이가 디스토피아의 유무를 결정한다. 물론 이것이 구체적인 해결의 가능성은 아니다. 다만 개인의 힘으로는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난감한 사회문제들에 대하여 명확한 해결책을 갖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부조리하게 개개인에게 부과된 책임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4. 새로운 디스토피아

     

디스토피아와 현대 사회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작가가 묘사한 디스토피아에서 결국 실체도 없고 특정한 주체도 없이 오로지 시스템을 통해서 피해자들이 가해자로 변모하고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이러한 디스토피아는 실상 우리 시대에도 찾기 쉬운 것은 아닐까? 대중으로부터 출발하는 사회의 실패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뭐 매일매일 벌어지는 SNS 마녀사냥하며, 정치적 사건도 개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사건들 속에서 쉴 새없이 적용되는 양비론은 책임을 일반인들에게도 전가하여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기 쉬운 가장 평범한 층위의 디스토피아는 굳이 SNS나 정치체제같은 거대한 시스템으로 검열자를 만들 필요도 없다.


  현대사회는 더 이상 스스로 검열을 할 필요가 없다. 보다 효율적인 인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발성을 필요로 하며, 자발성은 이제 스스로 자신을 검열하는데 사용된다. 그 대상은 일에 허덕이는 직장인들일 수도 있고, 취업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취준생일 수도 있으며, 수능대박을 위해 공부하는 중고등학생들 일 수도 있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쓰레기같은 하루를 보내고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난 쓰레기야.' 아니면 최종면접에서 계속해서 고배를 마신 탓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난 쓰레기야' 맞다. 어떻게 해도 실패하면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죄의식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과연 개인에게 강요되는 죄의식, 자신을 최대한 계발하지 못한 데에 따른 죄의식을 개인이 감당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실상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회의 이상이다. 그러나 개인들은 그것을 자신의 이상으로 치환시켜 스스로 강요한다. <꿈의 궁전>이 공포를 매개로 운영되는 시스템이라면, 현대사회는 특히 한국사회는 사회적 이상을 동력삼아 운영되는 디스토피아이다. 뉴스의 한 기사에서는 한국의 중산층의 조건으로 집 평수와 월급, 자동차, 예금액, 그리고 연간 해외여행 횟수를 뽑았다. 가시적으로 남들에게 보여질 수 있는 수치만으로 우리의 생활을 평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기준만 있고, 개인적인 가치는 실종되어있다. 실상 사람들의 목표는 사회적 이상이지 개인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리고 개성이 제거된 채 사회적 이상만 쫓도록 강요받는 사람들은 결국 하루하루의 성과에 따라 죄의식을 양산할 따름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와 같이 헐값에 팔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죄의식을 지니게 되는 개개인의 모습은 새로운 디스토피아라고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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