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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Feb 23. 2018

14-1. <회색인간> 뒷담화


*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느빌런(?)들의 열띤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겠습니다.

* 발제문과 뒷담화는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 이 뒷담화는 <꿈의 궁전>이어 작성된 (디스토피아) 키워드의 두번째 텍스트입니다.

*이번 모임엔 [박루저, 다희, 이주,  일벌레, 최생]님이 참여했습니다.

*본 녹취록은 이전 게시글인 '발제문'을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참고 링크 : ( https://brunch.co.kr/@neuvilbooks/87 ) 발제문



이주  : 발제문은 급하게 썼지만 책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작품 하나하나를 파고들면 말할 거리가 더 많지만 전체적으로 다루다보니 희생이랑 차별이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발제문을 썼습니다.


다희 : 읽을 때에는 발제문을 어떻게 할까? 궁금했는데, 정리가 잘돼서 좋았습니다. 노동하는 작가의 감성에 대해 언급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박루저 : 읽으면서는 주제가 희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읽고 책을 덮고 나니 공통된 주제를 잡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그리고 이번 주제인 디스토피아랑 연결이 되긴 힘들지 않나 싶기도?



노동하는 작가


일벌레 : 차별을 짚어내는 게 인상 깊었는데, 디스토피아보단 희생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됐어요. 차별의 정당성을 좀 더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감성이란 문구는 작품 자체보다는 작가의 상황에 따른 문구라 와 닿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기획자의 시선이 작가를 노동자로 규정하고 시작한 것 아닌가요?


박루저 : 저도 비슷해요. 작품이 작품의 문학성보다는 노동자라는 작가의 정체성으로 판단하는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의 매력은 애드거 앨런 포나 일본의 환상문학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노동자가 쓴 소설'이란 작가에 대한 평은 공감이 안 갔네요.


이주 : 노동자가 그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사회에 뛰어든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 그냥 일하는 작가, 예를 들면 10년 전 20년 전..


박루저 : 100년 전?


이주 : 예시가 너무 오래됐나요..?  어쨌든 앞으로의 작가들은 과거의 전업작가가 아닌 노동하는 작가가 될 것 같고, 이제 노동하는 작가가 되어야만 하는 필연성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이 작품에선 마케팅적인 부분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요.


다희 : 읽고 난 후 생각해보니 기존의 문학들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시선 속에 은연중에 노동이나 돈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둘었어요. 그러나 여기선 돈이나 노동이 인간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요건으로 등장하잖아요. 숭고하게 포장하지도 하찮다고 치부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노동의 가치를 표현한 것이 좋았어요. 여전히 한국에는 전업작가에 대한 낭만이 남아있지 않나요? 이 책은 그런 낭만적인 문학 부심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어요.


박루저 : 저도 기존의 작가들이 지닌 문학 부심이 느껴지지 않아서 김민섭 선생님이 애정 있게 바라보지 않았나 싶었어요. 작가가 겸손하다는 얘기가 계속 나와요.  


이주 : 맞아요. 그냥 소위 문학하는 작가라는 부심이 없이 겸손한 글쓰기여서 기대가 됩니다.



새로운 소설


박루저 : 김민섭 쌤 보면서 느꼈던 게, 비평가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운 시도가 등장했을 때 이런 식으로 소개하고 긍정적인 부분을 부각할지 아니면 기존의 성향에 따라 판단하고 묵살할지가 비평가들의 선택이잖아요? 그래서 이 기획이 좋았어요. 문단이랑 별 관련 없는 사람들이 기회를 만들어내서 좋았어요.


다희 : 그래서 부심 있는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문체나 너무 직접적인 표현들이라던가.

박루저 : 최생이 인터넷 소설 긁어 온 것 같다고 했죠?

이주 : 여기에 없는 동석도 그랬어요.


최생 : 맞아요. 하지만 그래서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여타 한국 작가들보다 읽고 싶어 하는 얘기가 뭔지 잘 찾아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말 하면 또 한국 작가들 싫어한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제게 더 익숙한 형식과 이야기라 좋았어요. 좋아하는 영드인 닥터 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엄청 새로운 느낌은 아니고, 이야기 자체는 새로웠지만, 상상력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박루저 : 저는 이 작품이 정의나 윤리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 쓰는 문체가 아닌 자신이 경험한 가치들을 기반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주 : 이 많은 작품을 1년 안에 썼다는 작업량도 놀라운 부분이에요. 보면서 재미있었던 건 최근에 벌어진 정치적 상황이라던가, 신에게 소원을 비는 부분이라던가, 연상이 되는 상황들이 있어서 현실감이 있었어요. 만약 커뮤니티에서 실시간으로 봤다면 더 재미있었을 지도?


박루저 : 난 이 소설이 <상량한 폭력의 시대>의 특징들이 심화된 것 같아서 인상 깊었어요. 환상성만  추가되었을 뿐인데,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조금만 심각해져도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으면서는 이런 감각을 굳이 문학으로 봐야 하는 생각도 들긴 했어요. 영화나 해외문학에서 많이 접한 감각이라 새롭진 않았고, '한국에서 이런 작가가?'라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벌레 : 여섯손가락은 실제로 있어서 아쉬웠어요. 전적으로 새로운 소재를 사용했으면 어땠을까요? 심지어(여섯 손가락이) 우성인데.


다희, 이주, 최생, 박루저 (문과생들) : 진짜?


일벌레(이과생) :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한쪽에 6개 이상 존재하는 경우를 다지증이라 말한다. 그런데 특히 손에 있어서는 전체 손가락 수는 다섯 개인데, 엄지가 2개이고 다른 손가락이 4개가 아닌 3개 일 때도 다지증에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육손이라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다희, 이주, 최생, 박루저 (문과생들) : 오... 신기하다..


최생 : 아쉬웠던 점은 결말이 너무 일침충같았습니다. 비꼬는 유머가 재밌긴 했지만, 진짜 같지 않았어요.


박루저 : 결말이 풍자적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것 같기도 해요.


다희 : 앞서 말한 것처럼 의성어라든가 결말때문에 인터넷으로 보면 재밌을지도 모르지만 책으로는 좀...


박루저 : 한국에 없었던 스타일인데, 붐이 되지 않을까요?  이 작품이 기존의 문단에 퍼진 작가 신비주의를 깨는 시작이 되었면 좋겠어요.


이주 : 일본 작가들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너무 신간이라 반응을 알긴 힘들지만, 문학으로 등장해서 좋았어요. 해외 소설들 중 액션이 넘치고, 쉽고, 재밌는 소설들이 많은 반면 우리나라 소설은 너무 무거운 경향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소설의 등장이 반가웠어요.


일벌레 : 패턴이 비슷해서 조금 지루해지기는 하더라고요. 그래서 뒤에는 잘 안 읽게 됐습니다. 이야기를 약간만 길게 끌고 갔으면 하는 아쉬움도 들어요. 결국 두더지의 정체를 찾는 게 작품들을 포괄하는 주제인가 싶기도.


이주 : 전체적인 구성은 조금 아쉬웠어요. 순서를 어떤 이유로 배치했는지 이해가 가지도 않았고요. 차라리 앞에 디스토피아를 넣어주고, 뒤에 인간적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을 넣으면 기승전결이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다 재미있진 않았어요.


일벌레 : 이어지는 작품들이 상반되는 주제를 갖고 있어 이해가 안 가기도 했습니다. <회색 인간>에서는 곡괭이 자루마저도 먹었는데, <협곡에서의 식인>에서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식인부터 하려하죠. 인간성에 대한 가치관이 들쭉날쭉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최생 : 인간의 긍정적인 면모와 부정적인 면모를 각각 나눠서 극대화 시켰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희 : 전 특히 <협곡에서의 식인>의 결말이 이해가 잘 안 갔어요.


일벌레 : 식인을 하면서 피를 먹었기 때문에 가족이 전부 에이즈에 걸리게 된 거 아닌가요?


다희 : 그렇게 걸릴 수가 있어요?


일벌레 : HIV의 감염경로는 성적인 접촉, 수혈이나 혈액제제를 통한 전파, 병원 관련 종사자에게서 바늘에 찔리는 등의 사고로 전파되는 경우, 모체에서 신생아에게로의 전파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이주 : 먹어서도 전염이 되나?


최생 : 되지 않을까?


박루저, 최생 : 이건 작가도 몰랐을 거야...


박루저, 이주 : 문학사에 남을 작품이 되면 좋겠습니다.

최생 :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소설이 힘을 받은 건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힘이지, 소설 자체의 힘이라고 하기엔 의문점이 듭니다. 그럼에도 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이주 : 전 이 사람이 계속 발전해서 더 큰 얘기를 써낸다면, 다른 작가들과는 상이한 감각을 보여줄 것이라 더 기대가 되요.


이주 : 차별이 없는 건 가능할까요?

일벌레 : 강력한 규제가 필요할 거 같아요.

다희 : 불가능해서 이런 작품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실재적인 감각이 없어서 차별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씁쓸했어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고요. 소설처럼 극단적 상황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사라지는 건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이것을 읽고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다면, 조금씩 나아지긴 할 것이라 생각해요.

박루저 : 구체적으로 한 단면이라도 알고 있는 평등한 사회가 있다면 롤모델로 잡겠지만, 평등의 상태가 뭔지도 모르는데 불평등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방식으로 평등이 드러나진 않을 것 같아요. 평등은 결국 알 수 없을 거예요.



문단 문제


다희 : 요새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문단내 성추행 사건이 있잖아요? 시인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에 충격을 받았어요. '노벨상을 받아야 하는데 왜 이제 와서?'라는 어조로 옹호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심지어 시인 중에서도 옹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박루저 : 문학계가 젤 느리다.

다희 : 일반인들도 옹호하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노벨상 받아야 한다면서.

일벌레 : 옛날 사람이라는 이유도 옹호의 이유예요.


최생 : 몰라서 그러는데 문단 사람들이 서로 다 아나요?

다희 : 등단 작가들끼리 모임이 생기고 한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최생 : 그럼 일종의 선후배 같은?

박루저 : 네. 문단 내 사람끼리 직접적으론 몰라도 스치면서는 다 안다고 하더라고요. 그럴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이주 : 등단하지마. 인터넷에 써.

최생 : 아냐 등단은 할꺼야.


박루저 : 문단의 분위기와 별개로 문학계의 성향도 문제예요. 국내에선 미국소설로 피츠제럴드가 여전히 1등인데, 다른 여러 국가들은 애드거 앨런 포를 1등으로 쳐줘요. 개인적으로는 장르문학이 무시받는 기조 때문에, 아직 피츠제럴드가 1등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김동식과 같은 작가들이 더 많이 나와서 순수문학에 대한 환상이 없어지길 바랍니다.


최생 : 문학 작품은 나라마다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박루저 : 근대성을 갖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문단을 좌우하기 때문에 근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근대랑 겹쳐 문화의 자리를 온전히 차지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문화가 언제나 문학으로 대표되어왔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근대적인 경향이 이어지고 있어요. 다른 나라들은 이미 다 근대적인 경향이 사라졌는데, 우리나라만 유독 심해요. 그 축소가 너무 느립니다. 영화가 뜨는 것도 문학에 위협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영상매체의 부흥이 문학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반응이 아직도 얼마나 문화가 문학에 의존적인지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어떤 매체건 서사가 좋으면 문학에도 도움이 되는 거 아닌가요? 나라마다의 차이이긴 맞지만, 우리나라는 확실히 더딥니다. 제가 교환학생으로 갔던 프랑스에서도 대중소설로 일컬어지는 기욤 뮈소나, 베르나르 등의 작가에 대한 위치가 상당히 높았어요.


최생(불문과) : 전 프랑스에서도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생각해요. 문학상 수도 많고 문학상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많고요. 기욤 뮈소나 베르베르 책을 읽기는 하겠지만, 최고는 아니지 않을까요?


박루저(프랑스 교환학생) : 개구라입니다. 구조가 달라요. 프랑스에선 문학을 개개인이 소비하는 게 아니라, 공공화된 시스템 속에서 소비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소비율이 더 높아요.


일벌레 : 도서관에서 보는 것도 문학의 소비 아닌가요?


박루저(인쇄출판 연구원) : 시스템이 완전히 달라요.

최생(보르도 출신 프랑스인) : 아니야.

박루저(프랑스 파리 거주했던 그래픽 노벨 매니아) : 아니라니까.


이주 : 독자들이 좋아하는 소설이 있는데 한국문학이 성향을 못 쫓아가고 지난 날의 향수에 취한 것이 아닌가요?


박루저 : 그래서 전 사람들이 문학을 버린 게 아니라 문학이 사람들을 버렸다고 생각해요. 전 대중문학 순수문학 구분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문단에서 순수문학과 대중소설을 자꾸 구분 짓는 행위가 그 차이를 벌린 거예요. 그래서 이 소설이 더 반가운 이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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