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을 통해 느낀점
아기와 함께한 해외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간 나는 집에 아기를 남겨두고 혼자서 혹은 친구와 프랑스, 영국, 스페인으로 떠났다. 아기와 함께 하는 여행은 아무래도 제약이 많고 고생길일게 뻔할것 같아서였다.
워낙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의 삶은 아이를 낳은 이후에도 아기를 낳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싶었던것 같다.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내 모습을 잃고 싶지 않았는지도. 아기를 낳기 전의 삶은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출산 전과 후로 나의 생은 극명하게 바뀌었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 틀림없다. 나는 이미 그 변곡점을 넘어 다음 장으로 넘어왔건만, 나의 마음은 아직도 이전의 삶을 기웃거리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종종, 마치 아이가 없는 시절의 나처럼 훌쩍 떠나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때때로 집에 두고온 아기가 보고싶기도 했고 혼자 아기를 보고 있을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즐겁고 재미있었기때문에, 나는 언제라도 또 혼자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면죄부처럼, 한번은 가족이 다함께 여행을 가고싶었다. 아기의 무료 항공권은 좋은 구실이었고, 실은 나에게는 면죄부가 필요했는지도. 단지 그 정도의 마음이었기때문에 떠나는 순간까지도 이번 여행에 대한 큰 기대나 설렘은 없었다. 그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기만을 바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여행은 "행복 그 잡채"였다. 내 다신 오나봐라 하며 진절머리나게 힘들지만 않아도 선방이라고 생각하며 떠났는데, '안왔으면 어쩔뻔했어, 다음 여행은 언제 갈 수 있을까' 달력을 넘겨보며 돌아왔다. 운이 좋게도 머무는 일주일 내내 날씨가 끝내주게 좋았고, 더 감사하게도 아무도 다치거나 아프지 않았다.
가장 고무적이였던 점은 아이가 너무 좋아했다는 것이다. 아가의 표정과 눈빛에서도 행복이 가득 느껴졌다. 아침 출근 전이나 퇴근 후 잠깐, 주말을 제외하면 엄마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여행을 와서 일주일 내내 엄마아빠와 함께 살 부비며 붙어 있으니 아이도 한결 안정감을 느끼고 좋아하는것 같았다. 그리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나도 아기도 서로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고 친밀해졌다.
나는 스스로 아이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6개월 무렵 복직을 해서 아기의 옆자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나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머리로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육아는 양보다 질이랬어,
하루종일 옆에 있어주지 못해도 짧은 시간이라도 더 많이 교감하고 사랑해주면 되니 괜찮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것을 희생했는데 라는 원망을 하게 되지 않도록 내 커리어를 포기하지 말아야지,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댔어 등등.
그럼에도 어쩔수 없는 본질적인 죄책감 내지는 미안함이 내 안에는 있었다. 그것이 이 사회에 가스라이팅 당한 것인지 모성애인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런데 아기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그 사랑스러운 눈빛에 나의 모든 죄책감은 씻겨 내려가고 나는 비로소 구원받는다. 아이는 아빠와 해변가에 앉아 모래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찌나 몰입했는지 파도가 밀려와 다리를 간질여도, 물살에 몸이 휘청여도 아랑곳 않고 앉아 조그만 장난감 삽과 플라스틱 컵에 모래를 담고 쏟는데 집중했다. 나는 멀찍이 나무 그늘 아래 놓아둔 짐꾸러미에 맥주와 콜라를 가지러 다녀왔다. 아직 10미터 정도는 남았는데, 저 멀리서 아이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세상 무해한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 순간 나는 온 세상이 정지하는것 같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나는 너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줄 알았는데.
아기는 이번 여행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인 나와 남편이 기억할 것이고, 이 시간동안 아이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행복한 감정들은 기억하진 못해도 아기의 뇌 어딘가, 기억의 저편에, 무의식 속에 틀림없이 남겨졌으리라. 기억하지 못한대도 상관 없다. 나는 얼마든지 아이와 함께 또 떠날 것이다. 내가 행복하고,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 순간의 아이가 행복하고, 우리는 그런 유년 시절의 행복을 일평생동안 먹고 사는 거라고 생각하기때문에.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