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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둥두 Nov 02. 2023

시작과 끝

얼마전 달리기를 하는데 왼쪽 무릎이 저려왔다. 칼로 후벼파는 듯한 통증에 잠시 멈췄다. 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정형외과에 다녀온 적이 있다. 모종의 이유로 그 정형외과에는 갈 수 없게 되어버려서 불안해졌다. 병원에 가서 다시 창피해질 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그렇고 이러다 무릎을 영영 못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기록은 항상되었고, 수행능력도 좋아졌고, 근매스도 근질도 눈에 보일 정도로 발전했는데 대체 왜 무릎이?



항상 조급함이 말썽이었다. 나는 달리기를 시작하면 힘이 가장 넘치는 초반에 스퍼트를 올리는 버릇이 있는데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잘 뛰는구나 싶겠지만 나한테는 최악인 습관이다. 직업이 학생이다 보니 하루종일 앉아있는 일이 일상다반사다. 평소에 활동량이 많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빠른 속도로 뛰어댔으니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게 이상한 일이었다. 운동하기 전에 준비운동이나 웜업을 해주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지만 항상 기본이 문제였다.



앞으로는 운동 전과 후에 스트레칭과 드릴을 열심히 해줘야겠다고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불현듯 이상함을 감지했다. 고작 30분 남짓 걸리는 달리기조차도 시작과 끝을 고민하면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제대로 살아내려는 노력은 하고 있었나? 돌이켜보면 이거해야겠다 저거해야겠다 생각은 많이 했지만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고 끝낼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 이른바 채우는 일에만 집중하고 처음과 마지막엔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꾸물럭거리며 휴대전화를 확인하거나 피곤에 찌든 몸으로 일어날지 말지를 고민하는 게 전부였다. 잠들기 전에도 배가 고파 허겁지겁 무언가를 욱여넣거나 아무 생각 없이 SNS를 쳐다보기 일수였다. 욕망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발전적이지 못 하다는 점도 문제였으나 가장 무시무시한 점은 이런 삶에는 내가 없다는 것이다. 피로, 배고픔, 허영심 같은 1차원적 정서에 자리를 내어주고는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 나에게 주어진 기회, 본받아야 하는 사람들, 감사해야 하는 대상들까지...



그냥 내 하고싶은대로 감정에 몸을 맡기는 게 가장 자유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제가 가장 중요한 미덕임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아버렸다. 아무런 고민 없이 살아가며 외부세계에 온 주의를 빼앗기는 일은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아니라 세상에 종속되는 과정이다. 잠을, 음식을, 그리고 스크린타임을 끊어낼 때. 이들을 내 통제 아래 둘 수 있을 때 원하던 삶에 비로소 가까워질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유는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만 얻어지는 것이므로. 더 이상은 나약하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그래서 많이 노력했고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연유로 하루의 끝과 시작은 더더욱 중요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시작만큼은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와는 관계 없이 그 마무리만큼은 내 소관이라는 희망이 매일매일을 흔들리지 않고 살아내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착실히 쌓아올린 하루는 언젠가 나를, 그리고 내 사람들을 지킬 방파제가 되어줄테니까.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고 모두를 품어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더더욱 강박적으로 루틴에 집중해야 한다. 



비단 내 자신과 하루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시작과 끝도 정말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흘려보내는 요즘, 문득문득 내가 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시작했는지 돌이켜보곤 한다. 첫 만남의 어색함, 용기 내어 건넨 인삿말, 지겹게도 물어봤던 고향과 나이. 모두가 그렇듯 시작은 이러했다. 작은 호의에도 고마워하며, 사소한 제스쳐나 말투에 일일이 의미부여하며 전전긍긍했던 순간을 지나다보면 동생들도, 친구들도, 모두들 어느새 내 옆에 있다. 언제 꺼내보더라도 결국 흐뭇한 미소가 번지곤 한다. 



잘못 지어진 매듭들도 있다. 때로는 나의 잘못으로, 때로는 그들의 잘못으로. 토라지고, 질투하고, 원망하며 풀어낼 생각 없이 질끈 동여맨 실타래 같은 관계들. 잘라내면 그만이지만 외려 너무 깔끔해질까 두려웠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멀끔해져서는 내가 다 맞는 것인양 기세등등하면 어쩌지? 그러다 또 여기저기 실타래를 만들고 마는 건 아닐까? 거추장스럽게 치렁치렁 늘어진 매듭들은 일종의 아집이요 경종이었다. 절대 잊지 않으리라는, 그래서 앞으로는 가급적 이러지 않으리라는 그런 종류의 다짐. 그래서 더더욱 잘라내지 못 하고 남겨두고 있나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이야기들이, 수 많은 인연이 펼쳐지고 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끝을 맺게 될까. 나에게 무엇을 남겨줄까.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글은 끝을 맺는다. 오늘은 "잘 지내자, 우리"를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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