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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둥두 Nov 02. 2023

사회학의 아름다움

내 아버지는 엄한 사람이었다. 잘못된 행동에는 불같이 화를 내셨고 때로는 매를 드는 일도 주저하지 않으셨다. 가장 싫어하시는 건 거짓말이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잘못을 감추려는 행동은 비겁한 일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이런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지만 나는 의문이 든다. 이걸 교육이라고 해도 될까 싶어서.


세 얼간이라는 영화가 있다. 성적 위주의 무한경쟁으로 학생들을 몰아넣는 인도의 교육체계를 비판한 영화이다. 주인공은 란초는 이런 세태에 항상 균열을 일으키고자 한다. 성적을 잘 받지 못 하면 사회에서 도태될 것이며 쓸모 없는 인간으로 전락해버린다는 교수의 협박에 주인공은 말한다. "서커스의 사자도 채찍의 두려움으로 의자에 앉는 법을 배우지만, 이건 잘 훈련되었다고 하지 교육되었다고 하진 않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내가 받은 것은 가정교육이라기보다도 가정훈련에 가까웠다고 본다(가정폭력을 당했다거나 우리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게 무서웠고 회초리는 따가웠다. 어린 시절의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는 거짓말이 왜 잘못 되었는지, 내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단지 무서웠을 뿐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이렇게 혹독한 훈육방식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아직 윤리관이 형성되지 않은 어린 아이에게 정의나 신뢰 따위의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시키려고 하기 보다는 위와 같은 방식이 행동억제에 더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느 정도" 라는 부분이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설명 없이 공포감만을 조성하는 훈육도, 강제력 없이 설명만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훈육도 각자가 나름대로의 한계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어디까지 설명해주면 되지? 이 정도로 큰 잘못에는 매를 들어도 되는건가? 쏟아지는 질문에 골머리를 앓다보면 어느새 문제는 저멀리 사라지고 복잡함만이 남는다. 인간은 복잡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간단하고, 명료하고, 직관적인 것들만이 선호되고 또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하곤 한다. "잘못했으면 무조건 맞아야지. 애들은 좀 때리면서 키워야 해~", "어떻게 아이한테 매를 들 수 있어요? 체벌은 절대 안 돼요!" 따위와 같은 말로 옳고 그름을 '딱' 정해주면서.


사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도통 쓸모가 없다. 극단적인 주장이 지니는 근본적 한계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가장 문제인 점은 실생활에 활용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무조건 맞아야지라는 입장 전자, 절대 때리면 안 된다는 입장을 후자라고 하겠다. 전자의 주장대로라면 밥상머리에 앉아 채소를 편식하는 아이에게는 바로 귓싸대기를(?) 올려붙여야 한다. 그럼 밥을 먹다 말고 얻어맞은 아이 "음..편식은 좋지 못한 행동이지. 앞으로는 채소도 먹어봐야겠군!" 이라고 생각해야 할텐데 과연 그럴까? 한편 후자의 주장대로라면 술을 잔뜩 먹고 무면허로 다른 사람 차를 훔쳐타다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경찰서로 옮겨진 아이에게 "얘야, 음주운전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몰라서 이랬던거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거야?" 라고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면 "이럴수가 내가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앞으로는 술은 쳐다도 보지 않겠어!" 라며  반성해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때리면 된다, 무조건 말로 해야 된다 같은 방식은 우리의 고민을 덜어줄 수는 있지만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 처치는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 우리가 진정 알고 싶었던 건 양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어느 지점이지 누가봐도 눈에 선한 끝자락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단 훈육 뿐만 아니라 삶의 과정엔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다. 대학은 성적이 가장 중요할까? 이 나이에 새로운 도전은 너무 늦은 일일까? 집 없어도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걸까? 명확한 기준 없이, 양극단 사이에서 오롯이 자신의 판단만을 믿고 아슬아슬한줄타기를 펼쳐야 하는 일들 투성이다.


뜬금없지만 나는 사회학이 해답이 되리라 믿는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사회학이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와 왜 그렇게 사는지를 사회와 연관지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개인이 사회를 변화시키는가, 사회가 개인을 변화시키는가. 이 한 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백년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고뇌하고 좌절했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이들에 의해 지배적으로 수용되는 의견들, 이를 테면 마르크스나 부르디외나 기든스와 같은 학자들의 사상이 있겠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배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제 아무리 다수설일지라도 비판적인 시각은 존재하며 시간이 지나 잊혀진 의견일지라도 받아들일만한 부분은 있다. 천편일률성과 절대불변성. 이것이야말로 사회학에서 가장 경계하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과는 사뭇 다른 성질을 띠기에 전공자가 아닌 사람, 특히 이공계열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어렵게 다가오는 학문이다. 맞으면 예외 없이 100%이고 그 외는 모두 거짓인 자연과학과 달리 사회과학에는 맞고 틀림의 엄격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럴 수도 있는 문제가 또 저렇게 보면 달라보일 수도 있다. 그 어떤 명확한 해답도 제시할 수 없으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학문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오히려 이런 점이 사회학에 몸 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백번, 우리는 선택을 한다. 무슨 상황에 놓였고, 자신이 어떤 처지이든 간에 결정은 자신의 몫이다. 이리저리 뜯어보자면 이래도 될 것 같고 저래도 될 것 같은 애매하기만 한 미래 사이에서, 어떤 손실을 감수하고 무엇을 취할지를 판정하는 과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불투명한 선택지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옳다고 볼 것인가, 나는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해당 의사결정과정에서 의탁할 수 있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자연세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사회 속에서 상호작용한다. 사회에는 완전한 어둠도 완전한 빛도 없다.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 그 사이에 조성된 회색지대에서 자신만의 명암을 찾아가는 일. 사회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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