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출근길 성장 에세이 Oct 07. 2020

나도 상견례라는 걸 하는 구나

그렇게 아버지는 소임을 마치시고 용산역에서 뻗으셨다

첫 만남 이후 양가는 빠르게 결혼을 진척 시켰다.물론 그 배경에는 아버님의 은퇴가 있었다. 

결혼할 사람이 았는 나와 첫째 언니는 2014년 안에 결혼하길 원하셨다. 


이미 첫째언니네 상견례는 2013년 말에 마쳤고 결혼을 다음해 5월에 하기로 했다. 

이제는 내차례.......


일단 우리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시는 걸로 했고 서울의 대표적인 상견례 장소라고 뽑히는 서울역 근처 한정식 집으로 예약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부모님은 11시 기차로 용산역에 도착해서 바로 한정식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난번처럼 얌전하고 또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 아침부터 신경을 썼다. 


아시다시피 용산역에서 환승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부모님은 도착하셔서 우여곡절 끝에 서울역 음식점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늦어진 시간. 음식점 입구에서 내가 부모님을 맞이하고 있을때 그녀와 오빠, 작은 아버님, 두 아주버님이 도착했다. 


양가는 어디하나 흠 잡을데 없이 정말 말끔히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평소 출근룩으로 꾸민 내가 수수해보일정도로, 이제는 내 면접이 아닌 가족면접 차례였다. 

양가는 서로 꿀릴게 없다는 듯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의 든든한 지원자 엄마, 아빠가 있어서 나도 기를 펼 수 있었다. 

좌석은 서열순으로 배정됐다. 어색함을 풀기 위한 음식들이 나왔고, 역시 첫 대화는 무난하게 음식 이야기로 시작됐다. 

음식 이야기를 시작으로 단연 우리 아빠의 활약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아빠가 말이 이렇게 많은 분인지 처음 알았다. 뭔가 가정에서의 아빠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아빠 모습을 본 듯했다. 


"이 구절판이라는게 0000부터 유례한 음식이에요. 경기도 지방은 잘 먹는데 전라도 지방은 잘 안먹어요"


아빠의 말은 끝이지 않았다. 본인의 30년 공직생활 이야기부터  작년에 지은 농사이야기, 은퇴후 계획 등 술 한잔도 들이키지 않으시고 말이 술술나왔다. 본인도 말이 많다고 느끼셨던지 중간중간 겸손의 말도 곁들였다. 


"제가 공직에만 30년 정도 있었는데 내년이 퇴직입니다. 남의 자식들은 잘 가르쳤는데, 정작 제 자식들에게 많이 신경을 못 썼어요. 그래도 샘이는 자기일 잘 알아서 하고, 대학도 서울로 가서 일찍부터 고생을 좀 했죠.... 제가 내년에 은퇴인데 은퇴이후에는 나라의 녹을 30년 정도 받은 만큼 다시 나라에 환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해외 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작년에 방울토마토 농사를 학교 운동장에 지었는데 아주 잘 여물고 있었어요. 열매를 보니 정말 귀하고 예쁘더라고요. 근데 장마가 한번 와버리니깐 모두 쓰러지고 다 떨어지고 거의 절반 가까이는 먹지도 못하고 버렸습니다...."


약 1시간 정도 음식과 함께 아이스 브레이킹 시간이 있었다. 디저트가 나올 쯤 본격적으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결혼에 대해 말 문을 연 것은 역시 그녀였다. 


"실은 제가 작년에 방광암 수술을 했어요. 큰 수술을 하고 보니깐 정훈이 혼자 집안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게 안스럽더라고요. 이때 옆에서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래는 정훈이 학업 끝내고 결혼 시키려고 했는데, 본인도 빨리 하고 싶어하고....그래서 애들은 언제쯤 결혼 시킬 생각이세요?"


"뭐 상관없습니다. 애들 편한때 하라고 하시죠"


그때 야무진 우리 엄마의 첫 마디,


"이이가 내년 초에 퇴직이어서 이왕이면 공직생활에 있을때 결혼을 시키는게 낫지 않을까요? 손님도 그렇고"


아빠와 엄마의 역할 분담이 이렇게 잘 돼 있다니 .... 훌륭하다. 


"결혼식장도 잡아야 되니까. 대략적으로 시기를 알려주시면 저희가 식장을 알아볼게요" 


"그럼 가을쯤 어떤가?"


"어머님, 가을 괜찮으세요?"


"그래 상황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래서 혹시 집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엄마가 침묵을 깨고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원래 이렇게 어려운 말을 바로 던지는 엄마가 아닌데, 엄마의 말에 나도 적잔히 당황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엄마를 팔로 툭툭 치며 작은 목소리로 


"엄마 왜 여기서 그런 말을 하고 그래"


라고 했다. 


"얘가 아직 학생이기도 하고, 전세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은데, 저희 집 윗층도 방이 3개여서 신혼집으로 시작하기에는 나쁘지 않아요. 샘이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 좁은 자취방에 비하면 방이 3개인 윗층은 또 어떠리, 근데 어머님과 같이 사는 거라니..... 나는 단번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때 아빠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 맨 처음부터 떨어져 살기보다는 어머님 윗층에 살면서 살림도 배우고, 서로 부대끼고 하는게 패밀리쉽 형성에는 좋겠다"


그 때 아빠의 표정은 모르긴 몰라도 진심이었다. 순간적으로 엄마는 딸의 시집살이를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아빠 만큼은 시어머님-며느리로 만났지만  서로 남남으로 사는게 아닌, 패밀리쉽이 형성되기를 바라셨던 것. 

아버님과 어머님은 익산에 있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서울에서 나의 진짜 가족을 만들어 주곳 싶으셨던 것 같다. 사실, 어머님과 같이 사는게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예상이 안됐지만, 

아버지 말씀이 너무 어른의 말씀이었고, 옳은 말씀이어서 그랬는지 나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네 ~" 


어려운 얘기가 끝나자 그녀는 이후에 예단, 혼수에 대해서 운을 떼기 시작하셨다. 


"그래도 저는 아들이 정훈이 혼자고,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라 결혼도 제대로 갖춰서 해주고 싶어요. 사돈 댁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어쩔수 없지만 저는 샘이 혼자라. 제가 해주고 싶은거 다 할게요"


그녀의 말은 감동적이었지만 듣기 편한 말은 아니었다. 그 말인 즉, 나도 어머님께 예를 갖춰 모든걸 해야된다는 말 아닌가. 그 당시 우리 엄마는 첫째 언니 결혼도 함께 준비하고 있어서 돈도 돈이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 혼수, 예단 등은 간편하게 하고 싶은게 엄마 마음이었다. 엄마도 딸을 처음으로 시집보내는 엄마였음으로. 


"네 그러면 그렇게 해야죠" 


결혼 일자, 집, 혼수, 예단 이야기가 끝나니 어느새 3시간 쯤 지난것 같다. 

아빠는 오늘 나눠야할 이야기를 다 나눴다고 생각하셨는지, 열차시간 핑계를 들어 일어나야 될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이후 나는 엄마, 아빠를 모셔다드리기 위해 용산역으로 갔다. 아빠는 용산역으로 가는 지하철안에서 너무 졸립다고 힘들어 하셨다. 장장 3시간 동안 열심히 활동하신 아빠였기에 당연하다... 결국 내려가는 티켓을 끊으시고 용산역 카페에서 한 숨 주무셨다. 


엄마아빠에게는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나는 그날 스스로 대견했다. 

내가 중학교때부터 아빠는 내게 '아빠 퇴직 전에 결혼하는게 효도다'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다. 

막상 아빠 퇴직을 2년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내게 사귀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을때, 아빠한테 죄송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2014년 2월, 정확히 아빠 퇴직을 1년 정도 남긴 시점에서 결혼의 첫단추인 상견례를 했다는게 스스로 칭찬해줬다. 


물론 집, 혼수, 예단 앞으로 넘어야할 산은 많지만....

















작가의 이전글 소개팅보다 더 설레었던 그녀와의 첫 만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