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켜야 되는 한 가지
글을 적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무슨 글을 쓰는지, 혹시 했던 말을 다시 한건 아닌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다. 케니라는 캐릭터가 가진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 이런 부분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케니는 불완전한 존재다. 계속 변화한다. 감정은 바람에 따라 움직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신념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래도 한 가지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 모든 사람은 다르면서 똑같은 존재다. 케니는 흑인이지만 나는 케니의 이야기를 단순한 흑인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지 않다. 케니라는 사람이 얼마나 나약하고, 그걸 보는 다른 사람들도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다른 곳에서 태어났고,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모두 똑같이 나약하기 때문에 똑같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집으로 갈 땐 항상 긴장해야 한다. 나는 최대한 옆을 보지 않고 앞을 본 채 주머니에 손을 짚어 넣고 여유로우면서도 빠른 걸음걸이로 집으로 향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거리에서 음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랩이나 R&B, 재즈 같은 음악 말이다. 될 수 있으면 비트에 몸을 맡기고 아무 생각 없이 춤출 수 있는 펑키한 음악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집 가는 길이 편해질 텐데. 펑키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리에는 누구도 인상 쓰지 않고 웃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차가운 권총은 땅에 두고 36.5도의 옆사람 손을 잡을 것이다. 옆사람이 피루 갱이든 크립 갱이든 제복을 입은 백인 경찰이든 음악 속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다.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는 자유인으로 존재하며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나도 어머니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똑같다. 그리고 모두가 다르다. 그런데 케니는 성공하려 한다. 모두가 똑같다면 성공하는 사람이 정의될 수 있을까? 우리는 남들을 끌어내리면서 성공한다.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앞지르기 위해 노력한다. 처절한 싸움의 끝에는 아무도 없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끝에는 아무도 없는 게임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승자의 환호를 듣는 것보다 더 자극적이다. 가진 것은 익숙해지고, 사라진 것은 증오를 낳고 집착을 만든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에게 성공을 강요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실패한 사람들. 더러운 것을 보고 자란 사람들. 이미 가진 것을 빼앗긴 채 태어난 사람들. 온갖 부정적인 존재. 부정이 더 큰 부정을 만들어 낸다. 증오와 집착이 만들어 낸 경쟁. 케니가 사는 세상에서 경쟁은 없다. 성공 자체를 바라지 않는다. 생존이 경쟁을 이겼고, 생존의 결과는 성공으로 받는다. 사실 결과는 알 수 없다. 성공을 맛본 적이 없기에 성공을 말할 수 없다. 케니의 동네에서는 생존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본능에 충실하다. 내면의 소리에 쉽게 흔들린다.
이 부분은 이야기가 이곳저곳으로 튀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다. 항상 조심해야 한다.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똑같다는 이유로 모든 이야기가 케니에게 향할 수 있다. 그러면 케니는 똑같지 않은 사람이 된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본인의 다름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모두가 똑같기 때문에 본인은 달라야 한다. 생존을 위해 다수가 되기 위한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내 눈앞에 보이는 다수가 어떤 존재인가? 나는 생존하기 위해 다수가 되려 하는가? 아니면 다수가 되는 것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인가? 케니는 과정 속에 있다. 생존하기 위한 과정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연속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케니가 꼭 지켜야 하는 것은 모두가 똑같고 자신은 다르다. 그리고 결국 모두가 똑같아질 수 있다.
"딱히 씻고 싶은 건 아니지만 물이 나올 때 씻어야 한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물이 나오지 않아 씻지 못하고 밖을 배회했다. 물론 사람들은 내가 씻었는지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어디로 가는지 관심도 없다. 길거리에 들어선 모든 이의 눈은 땅을 향하고 있고, 가끔씩 눈을 흘깃 거리며 걸어갈 뿐이다. 길거리에서는 길거리의 법이 존재한다. 법률 조항처럼 다양하지만 글을 모르는 사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 그리고 헌법 1조가 무엇인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온몸으로 법을 느낄 수 있다. 길거리 위에 서있는 두 발 위로 둔탁하고 묵직한 비트가 느껴지면 대부분이 흑인들인 사람들의 몸이 비트에 반응하고 온몸의 모든 신경들이 길거리의 공기 속에서 춤춘다. 나는 변화무쌍한 공기의 흐름에 내 두 발과 두 눈 그리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몸을 맡긴 채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다. 발걸음은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한다. 고개를 푹 숙이기도 하고 눈을 흘깃 추켜올려 내 눈앞에 춤추는 몸뚱이를 바라보게도 하는 비트의 끝은 어디인가? 매일을 그 비트 속에서 살아왔는데 그 끝에 대해서는 들은 것도 본 적도 느낀 적도 없다. 그저 중간중간 비트가 약해지면 두 발을 멈추고 다시 비트가 강해지길 기다린다. 그리고 비트가 강해질 때 내 몸속을 흐르는 피는 용광로처럼 불타오르고 심장은 빨라지는 비트에 맞추기 위해 부서질 듯이 뛴다. 서서히 몸과 정신이 하나가 되고 내 몸은 정신을 지배한다. 내 두 눈은 다시 돌아오고 정신과 몸이 서서히 분리된다. 살아 돌아온 정신은 내 빰을 있는 힘껏 때린다. 그리고 찰진 욕지거리를 남기고 제자리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