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명의 끝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어디에서 시작한 걸까? 분명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 지경까지 와버린 걸까? 케니는 감정 기복이 심한 아이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고 해야 할 일은 많다. 그리고 겪어 보지 못한 시간을 배우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밀려오는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해 생각한다. 뭐가 문제일까? 사실,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개운해지고 싶다. 온몸을 짓누르는 죄책감으로부터 해소된 감정을 느끼고 싶다. 가장 그럴듯한 변명을 찾는다. 순간의 개운함을 위해 또 시간을 허비한다. 변명과 함께 시간을 흘러 보낼수록 내가 붙잡아야 할 시간의 크기는 더 커지고, 내가 가진 시간은 계속 줄어든다. 그리고 내 뒤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걸어가야 한다는 부담감과 두려움은 계속 커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변명 또한 커진다. 결국 모든 변명이 끝나는 시간 또한 올 것이다. 피하고 외면했던 감정이 쏟아질 것이다. 지나간 시간의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떨게 될까? 쏟아지는 감정에 쓰러지고, 몰아치는 시간에 휩쓸려 나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실 이걸 바랐던 게 아닐까? 고통의 시간이 지나간 뒤 찾아오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이 또한 변명이다.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나간 시간의 후회를 뒤로 하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나는 후회할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행동하지 않았다. 모든 변명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행동해야 하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데. 한 문장, 한 단어, 한 글자라도 적자. 나는 생각하고, 케니는 말한다. 나는 알고 있고, 케니는 행동한다.
"내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현실들. 내 손에 묻어있는 붉은 피가 모든 걸 말해주지만 나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내가 본 건 오로지 내 몸속의 뜨거운 피뿐이다. 내 손에 묻은 피가 차가워질수록 내 정신도 냉정해진다. 비트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는 힘껏 도망친다. 빨라지는 심장 박동수와 함께 비트도 점점 빨라진다. 복잡해야 할 머릿속은 오히려 깔끔하다. ‘그는 흑인이잖아.’ 도망치면 모두 사라질 일들. 그래서 계속 일어나는 일들. 몇십 년이 지나도 이 망할 레퍼토리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게 신이 우리에게 두 발을 준 이유니까. 그래서 쿤타킨테의 발을 잘라버린 것이다."
케니의 입을 빌리자. 내가 케니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언인지 생각해 보자. 케니의 삶이 만들어진 이유를 생각해 보자. 투팍, 켄드릭 라마, 에미넴, N.W.A., 스눕 독, 릴 웨인, 조이 배드에스, 칸예 웨스트, 제이 지, 에이셉 라키, 로직. 그들의 가사 속 이야기. 직접 겪지 않은 일을 그려낼 수 있는 이유. 거리의 입들이 모여 만들어낸 케니의 이야기를 그리자. 케니의 세상 속에서 케니가 겪는 일, 케니가 갖게 된 생각, 케니를 움직이는 환경. 그들은 거리의 이야기를 했다. 강요하지 않았다. 케니는 거리에서 살고 있다. 나는 케니의 거리를 보여줄 것이다. 문제는 문제로 존재할 뿐이다.
"어느 곳도 가기 싫을 때 갈 수 있는 곳. 무뚝뚝한 흑인 여성이 불친절하게 주문을 받고 성의 없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곳. 라지 사이즈 콜라 하나만 시켜도 몇 시간 앉아 있을 수 있는 곳. 우리 동네에서 바깥세상과 가장 단절된 곳. ‘부기부기 버거’에 나는 앉아 있다. 라지 사이즈 콜라 하나를 시켜 빨대를 입에 문 채 콜라를 빨아 마시며 창 밖을 보면 나는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거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을 경멸하며 마시는 콜라 맛은 어느 것보다 맛이 좋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살아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곳이 한순간에 내 손바닥 위에 있는 흑인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여느 장난감처럼 괴롭히면서 희열을 느낀다. 이게 백인이 된 느낌일까? 아무리 찌르고 때리고 던져도 내 손에 전해지지 않는 아픔을 즐거움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느낌. 노예제도가 왜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장난감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거니까. 장난감은 말도 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눈물도 흘릴 수 없지만 백인들의 장난감은 모든 게 가능했다. 그만큼 백인들이 느끼는 희열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 그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했나요? 하나님의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백인들의 희열을 보고 벌을 주지 않았나요? 아니면 하나님도 백인인가요?"
케니가 아무리 발악해도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케니는 생각할수록 더 심한 고통을 얻는다. 아무 답도 찾을 수 없다. 이미 답을 찾았다고 생각한 사람은 너무 높은 곳에 있다. 그리고 그들의 답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제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성공했다. 거리를 떠나는 것은 유일한 정답이 되었다. 나도 케니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떠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거리를 떠나기 위한 노력이 무엇을 만들어 낼까? 이 질문이 케니를 만들어 나간다. 케니가 하는 모든 행동의 이유가 된다. 케니가 멈췄을 땐 변명이 된다.
나의 모든 신경이 케니에게 몰릴 때, 시간은 비로써 제 역할을 한다. 사라져 버린다.
"어릴 때부터 이 거지 같은 동네에 살면서 나는 언제나 후회했다. 갈 곳 없는 내가 햄버거 가게를 나온 것처럼. 양아치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후회는 더 심해졌다. 지지 않으려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그리고 죽지 않으려고. 나는 더욱더 강해지려 했고, 남들이 하는 양아치 짓을 따라 하려 했다. 이 동네는 하나의 사파리 초원이니까. 무리에서 멀어지면 누군가의 사냥감이 되고, 발악하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죽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규칙이다. 약육강식의 세계를 그대로 따르는 우리의 세계. 먹히지 않으려면 먹어야 했던 세계. 아무리 질기고 역겨운 고기라도 살기 위해 먹어야 했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더 사악해지고 삐뚤어졌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는 게 우리들에게는 가장 옳은 길이었다. 그 누구의 마음에도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지만 우리가 배운 건 길거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뿐이었다. 학교를 가도 졸업은 하지 못한다. 졸업을 해도 더 높은 학교로 가지 못한다. 우리를 묶고 있는 콘크리트 수갑은 우리 발목을 꽉 잡고 영원히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누가 우리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가?’ 아무도 없는 길거리에 구름 만이 둥둥 떠다니는 하늘 위에 소리쳐봐도 대답은커녕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신은 왜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는가? 신은 왜 수갑을 풀 열쇠를 주지 않는가? 이것이 신의 뜻인가? 신의 계획인가? 아무리 많은 물음표를 던져도 단 하나의 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 신은 없다. 적어도 우리를 위한 신은 이 미국 땅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