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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연주리 Sep 12. 2019

비맞는 사람들 - 비 오는 날을 만끽하다

다시 스무살이 된 나

인생에서 가장 신나는 나이, 스무살에 아일랜드로 떠났다. 

수능을 잘 못보고 재수까지 실패하면서 너무나 속상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약한 나에게 엄마 아빠가 엄청난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아일랜드라는 나라를 택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가 수능을 못 봤다고 나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없는 나라. 나에게 쓸데없는 응원을 보내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한국인이 가장 없는 나라" 였다. 다 좋은데 아일랜드는 안 좋은 게 딱 하나 있다고 당시 유학원 직원이 말했는데 그게 바로 ‘비 오는 날이 많다’는 것이었다.


과연 아일랜드는 수시로 비가 내렸다. 그래서 오히려 아일랜드 사람들은 웬만한 비에는 우산을 쓰지 않았다. 그냥 비를 무시하고 사는 듯 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에서 20년 쭈욱 산 토박이이므로 우산을 늘 가방에 넣고 수시로 펴고 다녔다. 그런데 어학원 같은 반에 엄브로즈라는 아주 잘생긴 프랑스 남자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비를 그렇게 좋아했다. 프랑스도 비가 아주 자주 온다면서 우산을 매일 챙기는 것은 매우 irritating 하다고 말하는 데 그 발음이 엄청 프랑스틱해서 내가 다섯 번이나 뭐라고? 뭐라고?를 묻고서야 성가시다 라는 뜻의 irritating 을 이해했다. 잘생겼으니까 내가 다섯 번이나 물어봐서 니 말을 이해하려고 한거지 딴 사람이었으면 그냥  I see 하고 넘어갔을게다. 실제로 비가 적게 오나 많이 오나 엄브로즈는 개의치 않고 비를 맞고 다녔는데 그게 또 있어보이기까지 하는 건 내가 엄브로즈를 멋진 사람 이라고 생각해서이겠지? 하하하 그래서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옴브로즈와 친구가 된 이후로는 나도 우산을 들고다니지 않았다. 그냥 비가 오면 맞고 많이 오면 잠시 피하거나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고 어딘가로 들어갔다. 그게 어찌나 재밌는지 옴브로즈랑  수업이 끝나고 밖에 나오면 비가 오기를 기도했을 정도였다. 비가 주구장창 계속 오면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기도 하고, 그냥 비를 구경하며 서 있기도 했다. 혼자하긴 민망하지만 같이 하면 웃음이 자꾸 나오는 끝내주게 재미있는 일이다. 한 번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엄브로즈 남방 밑에서 비를 피하기도 했는데, 향수를 뿌리지 않아서 더 좋은 향이 났던 엄브로즈의 냄세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립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니 비가 조금만 와도 사람들이 우산을 펼쳐 들더라. 우산이 없으면 편의점에서 사서라도 꼭 쓰고 다니는 한국이 잠시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추억은 마음에 묻어둔 채 십년을 넘게 다시 한국인으로 우산을 써 왔다. 그런데 지성이가 세살이었을 때 빗물이 고여있는 웅덩이를 보면서 너무나 신나했다. 옷이 젖는데도 신나서 물웅덩이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놀기에 행복해 보여서 한참을 지켜보았다. 나중에는 우산이 무거우니까 나한테 우산을 맡기고 놀았다. 이 경험 이후로 지성이는 비만 오면 웅덩이 홀릭이 되어서 물웅덩이만 보면 멈춰서 참방참방 놀았다. 올해도 변함없이 장마에 다같이 비를 맞으러 나와서 놀고있는데 갑자기 ‘아일랜드 추억’이 되살아났다. ‘맞아, 나도 비오는 날 엄브로즈랑 눈 마주치면서 엄청 신나게 웃었었지.’ 추억을 소환해 준 너희 덕에 이날은 나도 다시 스무살이 되어서 신나게 비를 맞으며 놀았다. 


나 혼자 빗속에서 놀면 미친년소리 들을텐데, 너희와 같이 놀면 애 잘키우는 엄마 소리 듣지 않겠어?

하하하 사실 나의 본능을 채우기 위해서 란걸 누가 알면 나를 욕하겠지만

나만 조용히 있음 남들은 내가 너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한다고 생각할거 아니냐 하하하하


너희와 놀아주는 엄마가 아닌 너희와 같이 놀아 행복한 스무살 학생으로 보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그날 집에 와서 너희를 재우고 나서 비 맞으며 놀던 생각을 다시 하는 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났다. 

내 마음속에 가장 즐거웠던 스무살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할까. 

다시 돌아가고 싶은 스무살이 잠시나마 되어서 너무 행복했던 걸까. 

어느덧 서른여섯이 되어버린 내 나이가 싫어서일까. 


아무튼 다음에도 비오면 너희와 같이 나가서 비를 적극적으로 맞아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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