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Dec 20. 2021

식물원에서는
전 생애가 지나가버린다

'식물원', 유진목


<식물원>, 유진목, 아침달, 2018.

시집은 25개의 흑백사진으로 시작한다. 오래된 흑백사진은 종종 가장자리가 구겨지거나 찢겨져 있고, 상이 흐릿하게 뭉개져있다. 사진이 찢겨진 자리, 닳아서 울퉁불퉁해진 끄트머리, 부옇게 번진 흰빛은 무언가가 비어있는 자리이다. 사라진 자리다. 한여름에 숲을 거닐다가 하늘을 올려다 보면 빼곡한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빼꼼 고개를 들이민다. 식물에는 항상 빈자리가 있다. 갈라진 잎맥, 가닥가닥 나뉜 줄기와 뿌리, 하나의 가지 위에 언뜻 불규칙하게 돋아난 듯한 나뭇잎들 사이에는 항상 비어있는 자리가 있다. 아름드리나무 안에도 하늘 조각과 바람 구멍이 늘 있다. 그러니 온갖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한 식물원에서 공백을 발견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다프네가 월계수나무가 되었듯 인간의 형상이 나무로 변하는 것도, 나무가 사람이 되는 것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일 테다. 


<식물원> 속에는 나무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서성인다. 식물이라면 모두 갖고 있기 마련인 빈자리를 한 손에 쥐고 식물원을 걷는다. ‘종려나무’ 속 그는 종려나무처럼 어깨를 흔들며 잠이 부재한 불면을 느끼고 ‘자귀나무’의 그는 고운 빗 같은 모양새를 보며 엄마를 떠올리며 ‘우산가시나무’ 속 그는 그늘 아래 앉아 잠시 쉬다가 방향을 잃는다.



이른 아침 그는 식물원으로 들어갔다.

해 질 녘 그가 식물원에서 나왔을 때는
전 생애가 지나가버린 뒤였다.



식물원 안에는 전 생애가 있다, 한 사람의 모든 생애가.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생애를 갖는 것이 가능한가. 시인의 시 속에서 한 사람은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 것이 아니라 생과 사를 거듭하고 거듭하여 한 번의 생애가 아닌 “전 생애”를 갖는다. ‘파르카이’에서 시인은 말한다. “그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 …  / 그는 죽은 채로 한참을 있었다 / 해가 지고 / 해가 뜨고 / 나중에는 날짜를 세는 것도 잊어버리고 /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고 / 돌아가고(78쪽)” 하다못해 태어나고 죽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채로 다시 태어나려고 다음 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조차도 생애의 일부이다. 이미 죽어있는 그는 죽은 뒤에 벌어지는 상황까지도, 태어나기 이전에 일어나는 일들까지도 감각한다. 꼭 씨앗이 최초의 싹을 틔우기 전에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처럼.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은 순간도 하나의 생애인 것처럼, 죽음도 유예도 탄생도 그 모든 생애들이 하나의 총체적인 기억이고 생애인 것처럼. 

파르카이는 로마 신화 속 운명의 세 여신의 이름이다. 



그는 여러 번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한번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한번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이미 태어났다가 죽은 그와 태어나기도 전에 벌써 죽은 그와 이제 태어나려고 하는 그가 시 안에서 뒤엉켜서 자리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게 되겠지. 그 소망은 때때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어그러지기도 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온힘을 쏟아도 끝내 실패하고서 무너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죽는 날도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 날도 있을 것이다. 

이슬아 작가는 <식물원>을 두고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 생에서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날 수 있잖아. 좌절이랑 고통이 우리에게 믿을 수 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주니까. 그러므로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었어. 다시 태어나려고, 더 살아보려고, 너는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느라 이렇게 맘이 아픈 것일지도 몰라.(<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이슬아, 헤엄출판사, 20쪽.)” 

속절없이 빠르게 낡아버린 사진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안타까워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게 고작 흐릿하게 뭉개진 흑백사진뿐이라 아쉬워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마음의 빈틈이, 삶의 빈자리가, 나의 부족함이 자꾸자꾸 눈에 들어와서 견디기 어려워지는 날이 있었을 것이고, 이미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빈공간의 존재를 깜빡깜빡 깨닫는 날에는 태어나지 않은 나의, 죽어버린 나의, 태어나려고 하는 나의 손을 잡고 말없이 식물원을 걷고 싶다. 식물원에는 제한시간이 없고 그 속에서는 전 생애가 지나가버린다. “입구와 출구가 다른 곳에 있으니 / 이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시인의 말)” 그러므로 전 생애 동안 걷고 나오는 길에는 분명 들어갔을 때와 다른 길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거면 됐다. 식물원을 걷기 전과 걸은 뒤의 내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전 생애를 기꺼이 헤매며 식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식물의 잎맥을 가만 들여다보듯 시인의 문장과 사람들을 기꺼이 바라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투쟁과 증오의 전설을 희망과 연대의 이야기로 얽어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