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충호 Jun 14. 2023

그의 불안한 눈빛과 거친 생각이 만든 선율을 사랑한다

Vangelis - 1492: Conquest of Paradise

나는 전자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그런데 딱 한 명의 예외가 있다. 반젤리스(Vangelis, 1943-2022). 왜냐고? 그가 그리스인이라는 점 외에 다른 이유는 나도 찾을 수 없다. 그의 음악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그리스인의 정서를 느낄 수 있어서 좋을 뿐이다.     

           

#Sailin’ Home - Demis Roussos


내가 반젤리스의 과거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혹은 허드렛일을 할 때 나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묶어주는 ‘내 관련 재생목록’을 누르는 편인데 그날도 그렇게 내게 익숙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러나 나의 흥을 돋우는 노래가 툭 하고 내 마음에 걸렸다. 목소리는 낯익은데, 누구지? 재생목록을 들여다보았다. Sailin’ Home, 데미스 루소스(Demis Roussos)? 처음 듣는 이름이어서 구글링을 해보았다. 그리스 가수였다. 그의 국적은 내 마음에 불시착한 근거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어진 설명은 나를 거듭 놀라게 했다. 그 옛날 어디에서나 흘러나오던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을 불렀던 Aphrodite’s Child의 리드 보컬이라고? 그 구성원 중 한 명이 반젤리스라고? 내가 사랑하는 반젤리스의 과거 폭로(?)는 이어졌다. 네 살 때 작곡, 여섯 살 때 피아노 콘서트, 대학에서는 미술 전공.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게 음악적 창의성 유지의 비결이라는 그의 고백까지.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질 때 배우들이 지었을 법한 표정을 나 역시 내었을 것이다.      


#1492:Conquest of Paradise - Vangelis


“콜럼버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닻을 올렸다는 것이다.”
– 빅토르 위고     

아메리카 대륙의 위대한 발견이라는 유럽인의 오만은 사실 아메리카 문명의 파괴를 맞이한 원주민 인디오들의 재앙을 덮어씌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가 목적지에 이르러 파괴로 이어진 낙원의 정복을 보여줬다면, 반젤리스의 음악은 목적지를 향해 닻을 올렸던 콜럼버스의 위대한 용기를 체감할 수 있게 해 준다. 지구는 평평한 땅이라 끝까지 가면 괴물이 살고 있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공포와 미신이 난무했던 시절, 어린 아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다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배의 모습을 보고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선구자. 

거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듯한 힘찬 선율에서 느끼게 되는 것은 그저 그런 끌림의 매력이 아니라 마치 주술에 걸려 따라갈 수밖에 없는 항거불능의 마력이다. 불안한 마음으로 배에 오른 선원들을 데리고 아득히 먼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사그라지는 그들의 신념에 잉걸불을 던지는 선장의 거친 열정이다.

탐험선의 가장 높은 돛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팬플룻을 불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황홀감을 이겨내지 못한다. 

          

#Chariots of Fire - Vangelis

   

지금껏 자신이 무엇을 추구해 온 것인지, 과연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 원했던 그 모든 것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 패배도 두렵고, 승리한 이후도 두렵다. 

삶의 목적과 목표를 생각에 담아두고 자신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고뇌였다는 사실이 무섭게 다가온다. 마치 동굴 속에서 듣는 이야기처럼 그 울림이 오래간다. 

그들의 ‘불안한 눈빛과 거친 생각’을 반젤리스만큼 절묘하게 잡아낸 음악인이 또 있을까, 회의적이다. 마지막까지 변치 않는 굳건한 신념을 지키는 젊음이 있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젊음이 그의 선율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금메달을 딴 후에도 조용히 자기 본연의 시간을 보내고, 승자가 짊어지는 무게를 고스란히 감당하는 숙연함까지 녹아있다.      

    

#To The Unknown Man - Vangelis Cover / Tribute (Arturia V Collection)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의 빈 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