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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충호 Jan 29. 2018

아버지의 빈 방

Schubert: Nacht Und Träume(밤과 꿈)

시간도 게으름을 피우며 흘러가던 토요일 아침,

숙부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급히 교통편을 알아보았지만

주말에 연휴마저 겹친지라

출발은 다음날 오후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별의 의식은 끝났지만

슬픔은 꽤나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떠나려는 사랑을 배웅할 수 있는 게

눈물뿐이었던 것이 그렇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빈 방을 서성거리며

일상을 이어가야 하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고향에 머무는 동안

근처 공원을 산책하면서 새삼 느꼈습니다.

제주인의 시선은 항상 바다 위에서 평안을 얻는다는 걸.

그 위안이, 사랑하는 동생들에게도 주어지기를.


부디,

남겨진 이들의 숭숭 뚫린 가슴에 부는 바람이

부드럽게 지나가기를.

다시 일어서는 무릎에 힘을 주기를.


1945. 11. 21. - 2023. 06. 03.



#Schubert: Nacht und Träume, Guitar Duo Pomponio - Zarate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집’




가족에게 가르쳐준 몇 개의 교훈과

화해하지 못한 세상에 얼마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가엾은 아버지는 빈 방마저 버리고 가셨습니다.

마지막을 찾아 슬프게 잦아들던 아버지의 숨결을,

하얀 거즈 아래서 끝내 뜨지 못했던 아버지의 두 눈을,

장남의 손 안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을 주지 못했던 아버지의 희망을,

나는 기억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결코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사랑과 평화를,

부디 푸른 하늘에서는 누리소서.

바람 속 푸른 자유를 마음껏 누리소서. 


1935. 08. 06. - 2007. 01. 29.



#Nacht Und Träume, Schubert · Dietrich Fischer-Diesk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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