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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충호 Oct 03. 2023

두 여자가 보여준 보랏빛과 연둣빛 사랑

아그네스 발차 & 조수미

모든 일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따른다. 사랑과 꿈이 화려한 후광을 두르기까지의 우여곡절은 그 어려움을 보여준다. 사랑은 너무 빨리 다가오는 이별이, 꿈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 현실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사랑과 꿈의 공동의 적은 시간이다. 시나브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잊히고 그리고 잃는다. 그 어려운 시간을 이겨낸 사랑과 꿈만이 보랏빛, 연둣빛 후광을 두른다.


To tréno févgi stis októ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 Agnes Baltsa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속의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속의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와 싸우기 위해 전선으로 떠난 레지스탕스 애인을 기다리며 매일 기차역으로 나가는 여인의 애수를 담아낸 노래다.


그리스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는 한 여인의 애잔한 독백을 꾸밈없이 단순하게, 세 번 반복된 멜로디로 들려줄 뿐이다. 슬픔의 골목을 조용히 빠져나온 연인의 기약 없는 이별은 광장 한복판에 불꽃을 던지고는 아무도 모르게 숲 속으로, 들판으로 한 점 바람되어 흩어져버린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애수를 자아내는 멜로디, 아련한 슬픔이 배어있는 보랏빛 그리스 음악을 좋아한다.  

   

그리스의 군사정권은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작곡가를 군사재판에 넘겨 투옥했고, 그의 노래는 그리스 전역에서 연주를 금지했다.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나는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 - 조수미       


나는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어요

하인들이 내 옆에서 시중을 들었고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나는 그들의 희망이자 자부심이었어요    

 

구혼자들이 내 손을 잡으려고 애쓰는 꿈을 꿨어요

기사들이 무릎을 굽혀 구애하고

어떤 여자도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맹세와 신의를 약속했어요    

 

하지만 나를 가장 매혹시킨 꿈도 꾸었는데 그것은

당신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아일랜드 작곡가인 Michael Balfe가 1843년에 발표한 오페라 ‘보헤미안 걸(The Bohemian Girl)’에 나오는 이 아리아는 싱싱한 생명력을 잃지 않는 첫사랑의 화신에 비할만하다.     

백작의 딸이었지만 여섯 살 때 집시 무리에 납치되어 12년을 보낸 오스트리아 여인과 집시촌에서 은둔하던 정치적 망명자이자 귀족인 폴란드 청년이 서로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성장기를 집시로 보낸 여인에게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 궁전에서 살았던 기억을 사실보다는 꿈에 더 어울렸으리라. 자신의 희미한 기억을 꿈으로밖에 고백할 수 없었던 여인이 그래도 행복했던 것은 그 꿈이 뿜어준 풋풋한 연둣빛 생기를 오아시스로 삼고 소중히 지켜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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