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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충호 Aug 28. 2017

이웃한 무관심과 우리의 비겁함에 관하여

The Oracle · Maria Farantouri

 언론노조 강원지역협의회와 주간신문 <춘천사람들>이 마련한 영화 <공범자들>을 단체 관람했습니다. 비극이 펼쳐지는 내내 객석 곳곳에서 탄식과 눈물이 흘러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분노와 울컥함을 반복하다가 극장을 나왔습니다. 내가 정작 눈물을 흘린 곳은 스크린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로비로 나오자 나와 면식(面識)이 있던 교사가 나를 손짓하여 부르더니 MBC 노조원을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영화관에 입장하기 전 언론과 방송의 제자리 찾기 운동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위한 서명을 했던 아내(역시 교사다)가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며 서명 철회를 하겠다는 겁니다. 마침 바로 옆에 춘천MBC 기자가 있었고 그는 체념인지 달관인지 모를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은 채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서명지를 갖고 있는 노조원이 이미 방송국으로 이동한 것 같으니 자신이  방송국에 도착하면 서명지에서 이름을 찾아 지운 후 카메라로 찍어 확인시켜주겠다며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얼마 후, 부인에게 자상한 남편의 민원을 처리한 기자가 혼자 있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그에게로 가서 아무런  없이 오른팔을 그의 어깨 위에 걸쳤습니다. 그것도 잠시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울기 시작했고, 그는 말없이 내 등을 토닥였습니다. 나는 교사인 내가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더듬거렸고, 그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서명을 철회할 수 있느냐'라고 죄 없는 그에게 따졌고, 그는 그럴 수 있다고, 괜찮다고 했습니다. 나는 '단체관람의 결과가 이런 것이면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이냐'라고 물었고, 그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영화는 우리가 지나온 비극을 보여주었는데, 현실은 여전히 희극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영화는 분노하라고 말하는데, 현실은 슬픔을 보여줄 뿐 희망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악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지만 인간은 평범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조건으로든 악과 흥정해서는 안 된다. 그 조건은 언제나 악의 조건이지 인간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헨슈처럼 악을 자신의 야망에 이용하겠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악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셰퍼처럼 더 나쁜 것을 막기 위해 악과 손을 잡을 때 인간은 또한 악의 도구가 된다.


 한참 전에 읽었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의 <자서전(Adventures Of A Bystander)> 속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드러커는 나치즘이 불러온 개인의 비극을 설명하면서 그가 조우했던 헨슈와 셰퍼라는 두 사람의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헨슈는 드러커가 금융담당 기자로 일했던 신문사의 동료 편집자였는데 이후 포악한 나치의 앞잡이 역할을 도맡아 ‘괴물’이 되었습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던 헨슈는 권력을 잡으려는 야망 때문에 나치의 중심부로 들어간 것입니다. 반면 ‘어린양’으로 불리는 기자이자 정치분석가였던 셰퍼는 나치의 만행을 막으려는 사명감으로 <Time>과 <Fortune>의 유럽 총국장직을 뿌리치고 한 일간지의 편집장을 맡기 위해 베를린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나치의 권력에 이용만 당하다가 2년 후 숙청되었습니다. 드러커는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함’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악은 극악무도하고 사람은 평범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악은 헨슈나 셰퍼 같은 사람을 통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얽히고설킨 사회문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수많은 헨슈와 셰퍼를 만나고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야망 때문에 진실을 방해하고 아픔을 더 아프게 하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사명감으로 생각하는 ‘괴물’과 ‘어린양’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입니다. 신분상의 불이익이 두려워 지지나 연대를 철회했던 그 교사는 헨슈도, 셰퍼도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피터 드러커도 지적했듯이 가장 커다란 죄는 20세기에 새로 나타난 무관심의 죄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산기슭만 맴돌다가 마을로 내려오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세상을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것에 덧붙여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앞으로 내게 다가올 적지 않은 시간 앞에 치열함을 더하고자 합니다.



The Oracle · Maria Faranto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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