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독립하면 다시 만나자
어렸을 때 가지고 싶은 장난감은 아주 많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기회는 1년에 딱 2번뿐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20세기에는 무조건 아끼는 게 미덕이고 절약은 당연한 시대였고,
넉넉하지 않던 살림에 애 셋을 먹이고 가르쳐야 했던 엄마가 사주지 않은 장난감이 단지 한 개뿐이랴.
장난감은 생일이랑 크리스마스에만 (작은 걸로)사는 거야.
토이저러스에 가면 눈이 돌아가는 내 자식들을 보면 나의 30년 전 모습이 딱 저랬으리라.
장난감은 보이는 것마다 모조리 가지고 싶었고, 레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의 가격 검열을 통과하고 계산대를 지나 집까지 함께했던 레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요즘 레고는 소근육 발달과 학습 능력이 길러진다는 이유로 부모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레고에 관심이 없는 아이에게도 부모가 일단 해보라고 블록을 쥐어줄 만큼.
애들 좀 있다는 동네마다 레고 대여점이 생기고, 배달을 통한 온라인 대여 서비스도 활성화되었다.
(라떼는 만화책 대여점은 있었지만 레고 대여점은 없었는데…)
우리 집 역시 아이들을 위한 듀플로부터 시작해서 자동차와 기차도 있고 레고가 한가득이다.
가끔 어린 시절 나에게도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 반 부러움 반.
대학생이 되어 독립한 후에는 (엄마 눈에는 쓸데없는) 아무거나 살 수 있는 자유가 생겼지만, 술 마실 돈도 부족했다. 간간히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술 마시는데) 부족한 용돈을 충전하곤 했다.
매장에 진열된 레고를 보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래 가격표는 재미로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처음 레고를 사게 된 것은 첫 아이를 낳고 50일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어느 날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레고에 대한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이 흘러넘친 건 아니고.
출산 휴가를 내고 육아를 하고 있었는데, 회사 지하에서 레고 패밀리 세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레어템 할인율이 20%? 이건 가야 해.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휴직 중인 회사로 달려가 오픈런 줄에 섰다. 레어템은 1인당 1개로 제한되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놓지 못한 레고는 빈손으로 돌아가는 동료에게 구매를 부탁했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1박스는 대리 구매한) 레어템 2박스. (언제 가지고 놀지 모를) 생후 50일 된 딸을 위한 2박스. 조카 선물용 1박스. 총 레고 5박스를 샀다.
산후관리가 필요한 나의 손목은 소중하므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결제한 금액은 생각하지 않고 커다란 레고 박스가 노오란 봉투에 담겨 나에게 왔다는 것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행복했다.
이후로도 매년 레고 패밀리 세일에는 반차를 내서라도 참석을 했다.
레고에서 온라인으로 패밀리 세일이 바뀌기 전까지.
레고가 왜 좋을까?
확신의 대문자 J여서 그런 걸까, 공대 출신의 성향 때문일까.
정해진 순서대로 착착 블럭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안정감.
마지막 피스가 딱 맞아 들어가는 순간의 쾌감과 감탄만 나오는 정교함.
내부까지 구현된 완벽한 디테일.
그 모든 게 매력적이다.
둘째의 최애인 변신 로봇들과는 비교가 불가하다.(진심으로 로봇 변신하다 속 터져 죽겠다.)
순서만 정확하게 따라가면 된다는 단순함이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창의력도 부족하고 선택이 늘 어려운 나에겐 이런 작업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시작은 어려웠으나 욕심은 커져 레고 모듈러 시리즈를 모으고 싶었다. 단종된 제품은 중고거래를 통해 원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을 내서라도 구입했다. 레고는 한 번 단종된 제품을 재생산하지 않아, ‘레테크’라고 불리는 훌륭한 재테크 수단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점점 늘어나는 레고를 보관할 공간이 없었다. 완성한 레고는 먼지가 쌓이면 청소가 매우 어려웠다. 다행히 남편도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람이라 레고장을 만드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렇게 만든 레고장은 금세 가득 차버렸다.
아직 개봉조차 하지 못한 거대한 레고 박스들은 안방 한구석에 점점 높이 쌓여있었다.
육아와 복직, 그리고 회사 업무는 늘어만 갔고 회사 출퇴근, 다음엔 육아 출퇴근에 바빠지며 레고를 조립할 시간과 여유는 없어졌다. 결국 미개봉 상태로 쌓여있던 레고들은 다시 중고로 판매했다.
브릭헤즈라고 하는 박스가 작은 레고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정리를 했다. 하지만 아껴놓았던 브릭헤즈는 결국 내가 아닌 아이들의 손으로 완성이 되어 레고장에 진열이 되었다.
아직도 새로운 레고들을 보면 마음이 들썩인다.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결제를 할까, 말까를 수없이 고민한다.
그러다 이미 가득 찬 레고장을 한 번 보고, 거실에 수북이 쌓인 장난감들을 보며 이걸 사면 또 어디다 두냐,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결국 장바구니에서 삭제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면, 텅 빈 집에서 마음껏 레고를 조립할 날이 올까?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쓰고 조립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 그래도 브릭헤즈는 그때까지 해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