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바라본 밥 루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야만 하는 책임감에 팀을 이끌기 시작했으며, 수정이 필요로 한 부분을 수정하고 뜯어고치며 5년의 시간이 흘렀고, 1999년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컨셉카 ‘Generation X’이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발표되었다.
“We Build Excitement” 폰티악이 과거 자신들을 표현하는 광고 멘트였다. 흥분을 만들어낸다는 기업답게 아메리칸 머슬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폰티악. 2010년 브랜드 폐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브랜드 중 하나였지만, 미국인들에게 폰티악은 GM의 스포츠성을 나타내는 주요 브랜드로 기억되고 있다.
북중미를 전역에 걸쳐 내수 중심의 브랜드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특이하고 창의적인 자동차를 만들어내던 폰티악은, 과거 뱃지 엔지니어링을 한 자동차들을 판매했던 비중도 컸었는데 오늘 만나볼 차 아즈텍 또한 지오 트래커 (스즈키 에스쿠도) 1세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후속작으로써 특이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꽤나 충격을 안겨줬었다. 과연 아즈텍은 어떤 자동차였고 어떤 매력을 가졌을지 오늘 이 시간 함께 알아보도록 해보자.
C7 콜벳의 아버지
톰 피터스의 작품
폰티악 아즈텍의 개발이 착수되던 해는 1994년이었다. 아즈텍의 디자인 팀장은 톰 피터스. 그는 쉐보레 C7 콜벳을 디자인한 디자이너였고, 1990년대부터 각종 GM차들의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은 젊이들을 중심으로 아웃도어 생활이 활성화가 되고 있는 시기였다. 그리고 폰티악은 당시 이렇다 할 SUV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가지고 있다고 한들 전부 일본차들을 기반으로 한 뱃지 엔지니어링 자동차들뿐이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의 GM은 내놓는 차량들 족족 어느 하나 개성이 없는 평범한 차들만 만들어내던 시기였고, 디자인이 심심하게 생겼단 비판을 많이 듣던 시기였다. 시장의 반응을 의식하여 보다 유니크하고 파격적인 차량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 톰. 폰티악 파이어버드와 GMC 지미를 섞어서 얻어낼 최상의 값을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를 바라본 GM 수석 총괄 디자이너 이자 톰의 상사인 ‘웨인 체리’는 “그럴 거면 폰티악 SUV를 만들어버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톰 피터스는 그의 제안을 토대로 아이디어를 이어나갔고, 그리고 그의 제안을 수용하게 되면서 “베어 클로”라는 코드명을 부여받게 되며 개발이 시작되었다.
70년대 GM 임원이었던
밥 루츠의 귀환
1970년대 GM의 임원으로 있던 밥 루츠. 그는 1990년대 아즈텍의 개발을 위해 다시 GM으로 컴백한 인물로 GM의 제품 개발 부사장으로 고용되었다. 그리고 그를 고용한 당시 GM의 회장 릭 웨고너는 그에게 말했다. “GM의 자동차 40%는 혁신적이어야 한다”라고 말이다.
그는 컴백하자마자 굉장한 중압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미 진행되고 있는 베어 클로는 이미 초기 시장조사부터 잘못되어 컨셉이 산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고, 베어 클로 프로젝트 당시 제품 개발 최고 선임이었던 돈 핵워스는 직원들을 갈구고 때리고 멋대로 행동하기까지 한 풍경을 바라본 밥 루츠는 머리가 아팠다.
이를 바라본 밥 루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야만 하는 책임감에 팀을 이끌기 시작했으며, 수정이 필요로 한 부분을 수정하고 뜯어고치며 5년의 시간이 흘렀고, 1999년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컨셉카 ‘Generation X’이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발표되었다.
발표 당시 아즈텍은 SUV라기 보다 한층 더 커진 해치백 형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미디어의 반응도 여태껏 없었던 대담한 디자인, 넓은 실내공간이 장점이라며 호평이 이어졌다.
뜬금없이
미니밴 플랫폼을
배정받다
그렇게 당장이라도 양산형을 내놔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던 아즈텍이었지만, GM 내부적인 꼰대 문화로 잘생긴 컨셉카를 망치게 된 계기가 된다.
양산을 위해 플랫폼을 할당받길 기다리는 아즈텍은, 생뚱맞게도 미니밴의 플랫폼인 U 플랫폼을 배정받게 돼버렸다. U 바디의 대표작은 올즈모빌의 실루엣, 오펠 신트라, 폰티악 트랜스 스포츠 몬태나 등의 미니밴이 대표작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다 슬라이딩 도어가 장착된 미니밴들이었다. 이미 컨셉트카를 발표하고 “연간 75,000대를 판매하겠습니다!”라고 발표한 마당에 한껏 치켜세운 카울과, 한순간에 좁아진 전폭, 그리고 밋밋해진 사이드 패널은 아즈텍에게 위기로 닥쳐왔다.
추가로 GM은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데 혈안이던 시절이었다. 억지로 이전 세대 차종에 쓰던 부품을 대거 재활용하거나, 전작보다 평가가 좋질 못했던 초기 디자인을 그대로 채택하는 와중에 어떻게든 차종 간의 개성을 살려내란 지시가 난무하던 시절이다. 속 사정을 모르는 소비자들은 톰 피터스의 디자인 능력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었다. 결국 아즈텍은 역대 못생긴 차 TOP100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차가 돼버리고 만다.
75,000대는
고사했다
그들이 목표로 한 75,000대는 그저 꿈으로 변했다. 오히려 GM은 실용성이 높은 차량이라 잘 팔릴 것으로 예상하고 3만 대가량 더 생산하기 위해 공장 증설까지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 회로도 잠시였다. 2001년 첫 출시가 되는 해에는 절반도 못 미치는 27,322대가 판매되어 처참한 실패를 거두게 되었다.
젊은 세대를 타겟으로 만든 차량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가격대는 젊은이들이 구매할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보기에도 아즈텍의 디자인 평가는 ‘너무 구리다’였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GM은 2001년 이후 허겁지겁 상위 트림이었던 GT 트림을 삭제하고 가격을 크게 내렸지만, 이마저도 안 먹혀들자 2002년 9월에는 리베이트 장사까지 해가면서 차를 판매하는데 급급했다.
정작 차주들의
만족도는 높아
하지만, GM이 내세운 실용성에 대한 강점은 실소유주들에게 증명이 되고 있었다. J.D 파워가 2001년에 선정한 “가장 매력적인 엔트리 SUV”로 선정하기도 했던 아즈텍.
실소유주들의 평가는 이렇게 나뉘었다. “엔진 파워, 실용성, 넓은 실내공간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완벽하다. 디자인만 빼고”였다. 아무리 내 돈 주고 산 차라지만 디자인은 결코 용납이 되지 않았던 2001년이었다.
형편없는 판매량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보면 GM은 아즈텍을 살릴 여지가 충분했었다는 게 당시 현지 업계의 평가였다.
아즈텍이야말로 GM에서 기존 성공작들을 벤치마킹하여 복제품을 내놓은 게 아닌,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자 했던 절실함이었다며, 아즈텍의 방향성과 컨셉은 높이 평가했다.
독특함의 다른 사례
플리머스 프라울러
아즈텍이 디자인으로 실패를 맛봤다면, 다른 미국산 자동차들 중 독특한 녀석 중 그래도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 플리머스의 프라울러가 생각난다.
플리머스의 마지막 차량으로도 잘 알려진 녀석은 미국의 핫로드 디자인을 기반으로 당시 프라울러의 디자이너 톰 게일 또한 핫로드 매니아로써 실제로 소장까지 한 이력이 있는 진성이었다.
프라울러의 파격적인 복고풍 디자인 속에는, 크라이슬러의 대형차인 뉴요커에 쓰던 3.5L SOHC V6 엔진이 들어갔고, 4단 세미 오토 변속기 오토스틱이 장착되었다. 1989년 단종된 플리머스 그랜 퓨리 이후 처음으로 출시한 후륜구동이며 알루미늄 골격 구조를 사용했다.
출시 당시에도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매력으로 상당한 이목을 끄는데 성공했던 프라울러는 오늘날에 와서 레트로 디자인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