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느린 아이 키우기
아빠가 편의점에 다녀온다고 하면서 장난으로 말했다 “있음아. 아빠랑 같이 갈래?”
“응”
내 귀를 의심했다. 엄마와 언니를 놔두고서 둘만 나가겠단다. 아빠에게 안겨 순순히 따라가는 모습에 분명히 변화가 느껴졌다.
엄마에 대한 애착이 안정되니 주변 사람으로 그 애정이 확장이 되는 모습이었다. 센터 다녀온 지 얼마나 됐더라? 달력을 찾아 기억을 더듬어본다. 한 달여 만의 일이었다. 엄밀히 생각하면 한 주 두 주 지나면서도 조금씩 안심을 해서 엄마가 화장실에 가도 아빠, 언니와 밥을 잘 먹거나 언니와 둘이 놀기도 하는 모습이 있었다. 이렇게 빨리 변화가 나타나다니 정말 뭔가를 놓치고 있었고. 그것을 찾아줬다는 기쁨이 서서히 찾아왔다.
우리 가족은 이동이 잦다. 일단 매일 어딘가를 나간다. 하다못해 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코로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줄어든 핫 플레이스들을 여유 있게 즐겼다던 사람들이 우리다. 그다음으로 이삼주에 한 번씩은 집을 옮겨 다녔다. 도시집과 산골집을. 집을 옮겨 다니면서 주변에 있는 놀이터와 공동육아나눔터에 거의 매일 데리고 다녔었다. 더 나아가 주말이면 답답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쌓게 해 준다는 명분으로 무조건 밖에 나갔다.
있음이가 ‘문을 열고 공간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에 거부가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공동육아나눔터 문을 보면 안 들어가려고 했다. 그 공동육아나눔터 마저 집 근처의 3곳을 돌아가며 방문했었다.
막상 들어가면 잘 놀지만 문 앞에서는 망설이고 두려워했다. 그 안에 계신 직원분들, 할머니께서 말을 걸면 와 ‘모두 나만 쳐다봐’하며 좋아한 적도 있지만 쑥스러워하거나 피하기도 했다. 문 앞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좀 주고 기다리면 들어갔던 적도 있었다. 문 앞에서 거부를 해서 아예 못 데리고 들어가고 발길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 정점은 센터에 처음 갔었을 때다. 아이는 상담선생님이 방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밖에 나가겠다고 어마어마하게 울었으니 말이다.
낯선 환경에 자주 노출 되는 것보다 한 곳에 계속 데리고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후로는 아침을 먹고 집에서 놀다가 지겨워질 무렵인 오전 11시쯤 유모차에 태워 매일 똑같은 놀이터에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는 아이가 한 명만 있어도 의식하며 주변을 뚫어지게 살피고 그 아이들이 놀이터를 점유하지 않을 때 만 움직였다. 점차 공간 자체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여긴 내 공간이라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잘 아는 공간에 가면 어른들도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는 계단이 있고 올라가면 흔들 다리가 있고 또 미끄러져 내려오면 되는 공간. 시설물 하나하나를 자유로이 탐색하며 놀다가 그것을 모두 파악해 버린 뒤엔 주변에 한 두 명이 와도 아이들을 의식하긴 하지만 즐기기도 했다.
언젠가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 20명 정도가 단체로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 아이들과도 서너 번 더 만났다. 같은 공간을 사용한 거다. 처음에는 내 손을 꼭 붙잡거나 흔들 다리 앞에 앉아만 있던 아이가 그 언니 오빠들에게도 관심을 보이고 아이들이 어린이집으로 돌아갈 때 같이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방법이 맞다 싶어서 8월경부터 추워지기 직전인 12월 경까지 매일 가는 놀이터를 중심으로 놀이터 한 곳만을 더 추가하고 늘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아이가 세상에 대한 경계를 조금씩 푸는 것이 느껴졌다.
종종 가는 공동육아나눔터가 있다. 최근에 방문해 보면 내가 아는 그 아이가 이렇게 성장한 게 맞나 싶을 정도다. 아이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꺅꺅 소리를 내며 좋아하고 문 앞에서 버티며 운 날도 있던 그 문인데도 빠르게 찾아들어간다.
돌 지날 즈음까지 언니 등하원을 내가 하고 있음이를 외할머니께 맡기고 갔었다. 등원하고 돌아오면 40분이 걸렸다. 하원까지 매일 80분. 매일매일이 아이에겐 불안 그 자체였던 게 아닐까.
엄마와 매일 아침 떨어져야 했던 아이는 보통 괜찮았지만 엄마로부터 떨어져 할머니손에 이끌려 옮겨질 때 서럽게 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머니 품이니까.
동생이 막 생긴 첫째는 폐위된 왕과 똑같다니 그를 위한다고, 내가 첫째를 등하원 한 게 잘못이었나 싶다. 둘을 어떻게서든지 같이 데리고 다녔어야 했나 자책한다. 백일도 안된 아이를 위해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었는데. 나도 덜 힘들고 아이들도 안정되게 키우고 친정엄마도 기꺼이 함께해 주셨던 그 상황이. 아이 둘을 위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선택이 돌이켜보니 내 몸이 편하고 첫째를 가까스로 지켜냈을지 몰라도 있음이에겐 불안감을 줬다.
다행인 건 일 년간 함께한 할머니의 음성, 체온, 감촉을 있음이가 몸으로 다 기억하는지 외할머니를 각별히 챙긴다는 거다. 그나마 따뜻한 사람의 품을 한자리 더 만들어줘 다행이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