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편지
저는 한때 다정하면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마음을 쓰고, 말을 건네고, 손을 내밀면
언젠가는 그 온도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장미를 사랑하던 <어린 왕자>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물도 주고, 유리 돔도 씌워주고, 바람을 막아주려 애썼습니다.
그의 다정은 분명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습니다.
장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왜 가시를 세우는지,
허영처럼 보이던 말속에 어떤 불안이 숨어 있었는지를.
장미 역시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부탁을 부탁이라 말하지 못한 채
자존심이라는 얇은 비단으로 마음을 감쌌습니다.
그 사이에서 다정은 조금씩 어긋났습니다.
어린 왕자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돌봄은 때로 장미의 숨을 답답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장미는 사랑받고 있었지만
이해받고 있다는 확신은 얻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결국 떠났습니다.
도망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멀어짐을 통해서야 그는 깨닫습니다.
“길들인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앙드레 지드의 『위폐범들』 속 에두아르도 떠오릅니다.
그는 선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습니다.
상대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도움이 필요한지,
아니면 혼자 견딜 시간을 원하고 있는지를요.
그의 친절은 틀리지 않았지만
상대의 리듬을 확인하지 않은 다정은
관계를 조금씩 어긋나게 합니다.
다정은 돌봄과 닮았지만
돌봄은 상대의 리듬을 배워야만 완성됩니다.
묻지 않은 배려는 방향을 잃기 쉽고,
확인하지 않은 친절은
상대의 공간을 잠식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 경계를 넘은 적이 있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건넨 말이
누군가에게는 또 하나의 감당해야 할 부담이었던 겁니다.
이미 지쳐 있던 사람에게
저의 관심은 위로가 아니라
설명해야 할 또 하나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린 왕자가 떠난 뒤에야 장미의 의미를 이해하고,
에두아르가 베푼 다정이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었듯,
저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침묵이 더 정확한 배려가 된다는 것.
곁에 있지 않음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고 숨을 고를 시간을 허락하는 태도라는 것을.
다정은 크기가 아니라 온도라는 걸
이제야 조금씩 배우는 중입니다.
말보다 숨이 먼저 필요한 순간에
그 숨을 막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물 대신 질문을 건네고,
유리 돔 대신 공간을 남겨두는 사람으로 말이죠.
어쩌면 사랑은
상대를 붙드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의 속도를 함께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다정을 베푸는 누군가의 친절이
값싼 동정처럼 느껴졌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다정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던 거지요.
그때의 마음을 시로 남겨두었습니다.
그 시를 보여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태양은 아무 잘못 없어> -윰세
빛나는 원에서
날아온 작살이
눈을 지나 머리를 관통한다
모진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억울한 눈물이 흐른다
햇살 한 줌을 손에 담아
집으로 돌아온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속삭인다
내일은
만나지 말자
숨을 틀어막던
검은손이 떨어지고
가쁜 숨을 헐떡인다
사람들은
웃지 않는 얼굴을 나무란다
물 밖에서 헐떡이는 물고기를 보며
숨이 멎기를 기다리는 시선처럼
던지는 위로의 말들은
쓰레기를 덮은 포장지
햇살은
아픔을 후벼 파는 칼날
나는 한 발 물러선다
해가 닿지 않는 쪽으로
일그러진 미간 사이로
내 몸을 숨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 속에
작게 접힌 내가 보인다
태양은 아무 잘못 없어
괜한 원망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