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호구?

[김유경의 오늘] 차선 변경하다 탈 난

by 김유경

부랴부랴 차 키를 집어 든다. 빨리 다녀와서 점심 차려야지. 할 일이 머릿속에 빼곡하다. 병원 앞 4차선 도로 안쪽으로 진입하려 뒤를 살피며 좌우를 훑는다. 1차선으로 들어서려다 클랙슨 소리에 놀란다. 멈칫하는데 쏜살같이 앞쪽으로 내달린 차가 깜빡이를 켜고 멈춘다. 운전석에서 남자가 내린다. 눈이 부리부리한 30대 후반이다. 내 차로 향하는 남자를 보며 사과할 문구를 고른다. 남자가 폰을 들이대며 성마르게 전화번호를 요구한다.


“부딪치지 않았잖아요?”

“빨리 전화번호 주세요. 문제 생기면 연락할 테니.”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별 .....”

“그럼 경찰 부를까요?”


앞뒤로 좌회전 차량들이 있어 전화번호를 건넨다. 나와 통화 시도에 성공한 남자는 신호가 바뀌자 유턴하여 골목으로 사라진다. 문득 불안에 휩싸인다. ‘내가 만만한 호구가 된 거야?’ 처음 겪는 일이라 진위 판별이 안 된다. 보험회사를 부를 일이 발생하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다. 매도 먼저 맞으랬다고, 112에 문의한다. 경찰관은 남자의 행동이 위법은 아니란다. 연락 오면 보험회사에 알리면 된단다.

초행길도 아닌데 갈 곳을 지나친다. 길을 잃은 느낌이다. 가까운 점포에 들어가 길을 물어 확인한다. 도착해 일을 처리하면서도 전화가 언제 올까 신경 쓴다. 그 남자의 표정과 억양을 떠올리니 걱정이 두꺼워진다. 입원한다고 하면, 혹은 어떤 물건이 깨졌으니 보상하라고 하면 억울할 것 같다. 오늘 전화가 안 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집으로 향하며 생각한다. 어쨌거나 원인제공자는 나다. 그러니 결과가 무엇이든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자.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필요 없다. 그저 어딘가를 다치지 않았기를 바라자. 돈 들 일은 보험으로 처리하면 되니 내가 애끓을 일이 아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식구에게 암 말 없이 점심을 먹고 후식까지 챙긴다. 식탁을 치우는데 전화가 온다.


다소 퉁명스런 목소리가 누군지를 밝힌다. 병원에서 괜찮다고 했단다. 이만 끊겠다고 할 때, 전화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 더욱 조심해서 안전 운행하겠다고 말한다. 나를 호구로 보나 의심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다. 그렇게 나는 놓여난다. 전화를 기다린 서너 시간이 나를 옭죈 그물이었던 셈이다. 아울러 시간에 쫓겨 툴툴대는 일상이 무탈한 것임을 알아챈다. 이래저래 얼뜬 나는 일시적 감정에게조차 휘둘리니 호구가 분명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냥 삶, 그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