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오늘] 누구든 마스크를 쓰고 나다녀야 한다
겉보기에 내 일과는 단조롭다. 관성처럼 세 범주로 돌아친다. 엄마 보살피기, 세상 훑기, 나를 사랑하기. 그러느라 아침은 두 번 깨고서야 맞는다. 첫 깸은 냉장고 녹즙을 컵에 담아 엄마 방에 두기 위해서다. 그래야 식전 차가운 액체가 엄마 위를 자극하지 않도록 실온으로 데운 생즙이 준비된다. 1시간 더 잠들었다 두 번째 깨어서야 일상의 쳇바퀴를 잽싸게 돌린다.
얼핏 보면, 삶의 쳇바퀴는 제자리걸음 같다. 그러나 순간들의 점묘화일 삶에는 새 경험지가 무궁무진하다. 오늘 아침 창문 열자 나를 끌어당긴 것은 뜰에 활짝 핀 모란(목단)꽃이다. 보통 5월에 피는데, 좀 이른 셈이다. 꽃 중의 왕이라 불리는 모란꽃은 향기가 은은하다. 꽃잎을 거의 떨구면서도 톡 쏘듯 다가서는 라일락향과 달리, 모란향은 자기 언저리에 둔중하게 떠돈다. 향기 없는 꽃이란 속설이 떠돌 만큼 옅디옅다.
사실 나는 모란꽃의 풍만한 아름다움이 안타깝다. 오늘처럼 까발리듯 노란 꽃술이 몽땅 드러날 때 젤 그렇다. 얼마 있다 저 큰 꽃잎들이 축축 처지다 떨어질 걸 예고하는 듯해서다. 그건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서린 상실감에 젖은 기다림과는 다른 차원이다. 부귀라는 꽃말을 따돌리는 영락의 이미지가 강해서다. 한껏 감탄하며 응시하다가 노파심에 젖는 내가 가소롭다. 늘 아쉬운 게 현재 집중인데.
뉴스에서 코로나19바이러스는 항체에서 자유롭단다. 그 증거로 재확진자수가 늘고 있다. 그러나 항체 없기로는 인생만한 게 있을까. 삶에는 리허설이랄 게 없고, 어떤 경험도 백신이 되진 않는다. 어느 정도 긴장의 끈을 쥐고 살아야 하는 이유다. 햇살과 산들바람에 취해 시장을 다녀오는 길에 마스크가 버겁다. 그래서일까. 마스크 없이 활보하는 사람이 꽤 있다. 김어준의 촌평 “바이러스는 피로를 모른다”가 떠오른다.
마스크 안 쓴 검찰총장 윤석렬이 보수 집회 장소에서 눈에 띄었다는 뉴스도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 두기로 긴장을 연장하는 장기적인 정책에도 어긋나는 공직자 행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해도 놓치는 게 없다 했다. 우연이란 없는 대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인간 문명이 치명적인 코로나19바이러스를 초대한 거라 여기면, 관계 그물의 삶에서 방심은 누구에게나 금물이다.
점심 후 1시간여 좌선을 한다. 나를 사랑함이다. 붙박이로 몸을 틀어쥔 듯해도 고요함에 젖다 일어서면 가쁜하다. 어제와 다른 경험지가 찾아들면 그 묘함은 배가된다. 고요 속에서 내 존재가 정신적 물질적 현상임을 알아채는 순간 행복하다. 그렇듯 내 것이랄 게 없다는 인식에 닿지 않고도 긴급재난지원금을 선뜻 기부하(려)는 사람들은 분명 나보다 윗길이다.
다시 뜰로 나선다. 노란색 겹황매화를 배경 삼은 모란꽃의 두드러진 자태가 고급진 건 연한 향기 덕이다. 겸허함이 공존의 동력이다. 저 붉은색이 사라지면 뜰 가장자리에서 연산홍이 만발할 게다. 라일락 아래 붓꽃도 얼굴을 들리라. 매년 마주하는 색색의 꽃들이지만 매번 새롭다. 저 작은 공간에서 서로 방해 없이 뿌리를 내리고 존재감을 풍기는 저들처럼 나도 살아가는 중이리라.
엄마는 왜 모란꽃을 최애할까. 내겐 꽃마다 그냥 꽃이다. 누구든 마스크를 쓰고 나다녀야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