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책씻이] <윤구병 일기 1996>(천년의상상, 2016)
안 읽은 묵은 책을 들추는 게 내 코로나19 일상이다. <윤구병 일기 1996>의 부제 “같이 산다는 게 뭔지 알아?”에 맘이 쏠린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각국의 각자도생의 조치들을 무력하게 해서다. 넘기다보니 변산에서 생활공동체를 꾸리려 철학교수를 관두고 농부가 된 윤구병의 일기체가 재밌다. 공동체 식구의 면면과 갈등 까발림이 일일연속극 뺨치는 농부앓이 드라마다. 농사짓기가 사람 농사와 둘이 아닌 게다.
구구절절한 일상 기록 짬짬이 통렬한 자기비판과 가차없는 인물평을 곁들인 사유 세계는 버지니아 울프의 27년 삶을 간추린 <어느 작가의 일기>를 연상시킨다. 그래도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는 사후에 남편이 문필 관련 부분만을 추렸기에 당시 생존자들의 민낯이 보호됐지만, 저자는 지금도 변산공동체를 대표하므로 일기 속 인물들과 수시로 마주칠 텐데……. 자기 언행이 비평에 노출된 걸 안 당사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어쨌거나 내 눈길을 생활공동체로 이끈 코로나19 사태는 국가가 건강한 운명공동체로 운영되어야 함을 일깨운다. 특히 확진 판정을 받은 이의 거짓말이 n차감염을 일으키는 위기 상황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는 연대 의식을 국민 개개인에게 요구한다. 규모가 작을 뿐 <윤구병 일기 1996>도 결국 행복한 밥상공동체를 위해 구성원 간 연대 방식에 골똘한다. 자연에 기댄 생활공동체의 고슴도치 사랑에 부대끼며.
저자는 여는 글에서 같이 사는 아픔을 고슴도치 사랑에 비유한다. 1995년 초창기 고슴도치들은 변산공동체 설립 공로자인 원칙주의자 전관유, 중간에 이탈한 제자 심장섭 부부(민정 엄마, 아빠), 그리고 저자 등 넷이다. <윤구병 일기 1996>에는 금란 씨, 봉선 씨, 비야 엄마, 유광식 군 등 점점 식구가 불어난다. 저자는 초짜 농사꾼인 그들과 갈등하는 자신을 밴댕이에 빗댄다. 하지만 2020년 현재 변산공동체는 건재하다.
“생활공동체의 복원,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가장 좋은 사람과 가장 나쁜 사람, 가장 예민한 사람과 가장 무딘 사람, 가장 어리석은 사람과 가장 슬기로운 사람, 가장 파괴적인 사람과 가장 건설적인 사람, 가장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불구인 사람과 가장 정상인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사는 그런 공동체의 복원이다. 따로 떨어져 살 때는 서로에게 지옥인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면서 조화를 이루어 살면 극락이 되는 그런 공동체. 그런 공동체는 생활공동체뿐이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가 자리 잡을 곳은 자연과 일터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농촌뿐이다.”(517~518쪽)
농촌에 터를 잡았지만, 난제는 속출한다. “공동체 살림이 아닌 개별 가구로 분리되어 주민으로 살기”로 한 변산공동체 존립 변수들은 여럿이다. 공동체 구성원 모집과 돈 마련, 재산 관리(탈퇴나 파국 시 대비책 포함), 구성원 간 화합, 지역 토박이 주민들과의 소통과 연대, 공동체학교, 방문객 연수, 가공식품 생산 및 판매 등이다. 저자는 물이자 시인의 정체성으로 함께함과 낯선 실사구시 농법을 개척한다.
“물이 되어 세상을 본다는 것은 맨 밑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물에게 가장 높은 상승의 경지는 맨 밑바닥이다. (… 중략 …) 마음공부는 어떤 때는 출가가 필요하지만 많은 경우 ‘함께해야’ 가능하다. 그래야 사회화가 된다. 고립은 나에게는 죽음이다.” (434~436쪽)
“참 시인은 비유하자면 운수행각을 하는 떠돌이중이나 제대로 농사짓는 농부 같은 사람이다. (… 중략 …)늘 낯선 것 사이에서 온몸과 마음을 활줄처럼 팽팽하게 긴장시켜 주위의 모든 것에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여 접촉하는 자세, 새롭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늘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렇게 해서 온몸과 가슴이 새로움으로 가득 차게 함, 이것이 길 걷는 사람의 마음가짐이고 시인의 눈이다. (… 중략 …) 낯설게 만들기, 낯선 세상 속에서 낯선 나그네로 살아가기, 끊임없이 사랑 속에서 일을 놀이로 만들기, 그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와 고통을 온 가슴으로 끌어안기.” (645~646쪽)
“흙일을 하는 동안 앞집 현숙이 아버지가 작업장에 와서 동네 사람들이 우리 농사짓는 것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래서 그런 줄 안다, (… 중략 …) 어차피 농약과 제초제와 화학비료 써서 농사를 잘 지어도 값이 미친년 널뛰듯 하면 뽑아서 버리는 경우도 많지 않느냐, 그래서 모두들 빚더미에 앉아 있는데, 씨앗이며 비료며 약이며 기계를 쓰지 않고 우리처럼 농사지으면 빚을 질 염려는 없다, 그리고 환금작물 중심으로 농사짓지 않고, 주곡 중심으로 지으면 시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어 이런저런 걱정에서 벗어날 길도 있다고 본다고 이야기했다.” 735쪽
일상을 낯설게 만들기는 소위 가정적인 남편의 마음가짐과는 거리 멀다. “연애소설 쓸 생각을 다시 한다.”(238쪽)는 저자가 별거하듯 서울에서 두 자녀와 사는 아내, 나래 엄마에 대해 드러낸 거침없는 감정 피력은 독자인 내가 민망할 정도다. 그러나 한편 아내에 대해 소통과 간섭은 어느 정도 하면서 거리감 좁히기에 애면글면하지 않는 사막스런 마음의 아름다움을 읽는 중에 느끼며 이해한다.
“내가 나래 엄마를 좋아하는 건 어떤 감정일까? 부부로서? 친구로서? 부부라면 살로 가까운 점이 있어야 하고 친구라면 뜻으로 가까워야 하는 점이 있어야 하는데, 둘 다 아닌 것 같고……. 이 둘과는 다른 감정인데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290쪽)
“남들은 명사라고 그러는데 빈구석이 많아 만만하”게 보인다는 농부 윤구병은 “한달에 1000만 원이 드는 호화판 취미생활을 한다는 비판”을 의식하며 실답게 농촌 구성원으로 정착한다. “중산리 형님”과의 친분을 시작으로 술도가집 등 동네 어른들의 인심을 사며 이장을 자네라 부르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틈틈이 출판사 보리의 일을 보고, 강연하고, 글을 쓰고, ‘한철연’ 이사장 역할을 하며 사회적 고리를 유지한다.
<윤구병 일기 1996>을 덮으며 자문한다. 잘 산다는 건 어떤 삶인가. 저자의 삶처럼 귀농이 답인가. 이미 많은 국토와 인구가 도시에 저당 잡혀 있는 마당에……. 물질적 정신적 생명을 일구는 일이 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고……. 저자의 각성일 “나눔과 섬김이 큰살림의 바탕이여”(413쪽)에서 대안을 찾을 수도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너나없이 혼자만 잘 살 수 없음을 학습했기에.
어쩌면 그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국가가 큰 틀의 밥상(생활)공동체로 작동되어야 한다는 주문일 수 있다. 동시에 그건 국민 개개인이 서로 안으려다 가시에 찔리는 고슴도치 사랑의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는 당위를 전제한다. 그러할 때 기업 투자의 낙수효과보다는 기본소득제로 풀뿌리 경제를 살리는 게 낫다는 패러다임 전환이 용이하다. 물론 그 낯선 길은 윤구병이 체득한 용기 낸 사랑으로 내내 뚫어야 하리라.
“사랑이 찾아오면/온몸과 마음으로 껴안아요/놓치지 말아요/이 순간 이 느낌/그래요, 바로 그거지요/사랑 속에 녹아버려요/과거도 미래도 녹아버려요/사랑이 무너지면/온 세상 함께 무너져요/기다리지 말아요/미루지도 말아요/온몸과 마음 활짝 열어/그냥 받아들여요/문밖에서 서성이게/하지 말아요” (918~9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