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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Dec 15. 2020

연두를 묻는다

[김유경의 오늘] 장자고분(莊子鼓盆)과 웰다잉

자정 직전에 연두를 묻는다. 주저주저하며 만진 연두는 이미 얼어 있다. 올겨울 최저온 영하 6도다. 연두가 앉았던 연산홍 관목 근처를 판다. 땅이 얼어 작은 종이관 놓을 구덩이 파기가 쉽지 않다. 살짝 다진 흙 위에 커다란 목련 낙엽을 얹는다. 온기를 전해주고프다. 일어서는데 자꾸 눈물이 비어진다. 메뚜기 한 마리가 두 달 남짓(10월 11일~12월 13일) 눈길을 끌더니 기어코 날 울린다.


(연두를 처음 만난 날, 10월 11일)


연두는 비바람이 거세던 다음 날(11월 19일) 지하 창틀에 붙어 있었다. 비바람이 내동댕이쳤으리라. 이미 날개는 상한 듯 그 부위의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이틀 뒤 연두는 180도 몸을 움직여 머리가 아래를 향해 있었다. 그러다 다음 날 다시 머리를 위로 향했다. 며칠을 그대로 있는 듯하더니 뒷걸음질로 조금씩 내려서다 머리가 앞이 되게 자세를 바꾼 12월 7일 바닥에 닿았다. 

     

가끔 연두는 머리를 앞다리에 대곤 한참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막막하고 외롭고. 무엇보다 세상천지에 혼자 달랑 존재하듯 사투를 벌이는 연두의 생명이 강하게 날 두드렸다. 쟤는 지금 뭘 느끼며, 무엇을 응시하고 있을까. 질긴 고투로 드러나는 저 근성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문득 연두에게서 나를 보았다.   


 (앞다리에 머리를 댄 연두, 12월 7일)                            

  

혼자일 때 내가 잘 보인다. 철저히 고독할 때는 더 그렇다. 내 몸이 전자나 분자 같은 요소들로 구성된 물질일뿐만 아니라 존재감 또한 관계에 매인 탓에 내 것이라 주장할 게 하나 없는 나란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존재가 얼마나 귀한 생명인지. 누구든 다 그러할 거라는 막연한 이해를 구체적으로 일깨운 존재가 연두인 거다. 

      

요즘 나는 고독을 조장하고 애용한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수록, 나와 엮인 사람들이 잘 보인다. 덩달아 내가 소중할수록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도. 그들을 향해 쏜 화살이 부메랑이 되어 날 향한다는 것 역시. 내 존재의 생기가 그렇게 돋아나고 충전된다. 아마 연두도 고독과 치열하게 직면하며 기죽지 않았으리라. 그러니까 내 눈물은 아내의 죽음에 대해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한 장자(莊子鼓盆)의 안도함이다. 

     

12월 13일 이른 아침에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연두가 마당에 제대로 착지한 이튿날이었다. 찬바람도 세찼다. 뛰어나가 살피니 연두는 약간 밀려난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내 눈으로는 상황 감지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내 투박한 손가락을 저 여린 생명의 촉수에 댈 엄두도 못 냈다. 상대에 대해 모르니 마음만큼 도울 수가 없었다. 난 돌아섰다. 더 지켜보자.


    (연두의 마지막 모습, 12월 13일)

      

내가 연두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동영상을 찍은 건 12월 11일이다. 바닥으로 내려선 연두는 아주 조심스레 온몸으로 탐지하며 힘겹게 걸음을 뗐다 쉬었다 한다. 탈진한 불구의 몸으로 연두는 어디를 향하는가. 그 간절한 동작을 지켜보다 곤충을 한갓 미물로 여김은 옳지 않다 여긴다. 곤충뿐이겠는가. 숨 쉬는 모든 것은, 목련나무 등 식물을 포함해서,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연두가 묻힌 뜰로 나선다. 겨울비 그친 내 집엔 환한 햇살이 가득하고, 난 여전한 일상을 맞이한다. 밖으로 나서는 나를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백척간두에 섰던 연두의 난감함이 짚인다. 희미해지는 언어 세계에 부대끼면서 맘대로 쓸 수 없는 낯선 몸을 나로 수용해야 하는 엄마의 안간힘과 닿은. 장자는 아내의 죽음을 훼손된 생명의 회복, 즉 자연의 순환으로 보았다. 그런 태도가 웰다잉으로 이어지리라.  


   (간밤에 연두에게 덮어준 나뭇잎이 바람에 날리지 않았다,  12월 14일)


마지막 순간까지 목적지를 향하던 연두처럼, 습관의 기억을 따라 일상을 부여잡는 엄마처럼 여하한 현실에서도 맥 놓지 않고 제 몫을 다하며 사는 게 웰다잉 아닐까. 생사(生死)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한다고 여긴다. (202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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