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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Dec 18. 2020

갇혀 있으나 열린 관계

[김유경의 책씻이]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마르그리트 뒤라스)

<타키니아의 말들>은 뒤라스의 마지막 동반자 얀 르메(뒤라스는 얀 앙드레아로 부름)가 열광한 책이다. 그는 28세 때 66세의 뒤라스를 만나 그녀의 구술을 옮겨 적는 손이 된다. 어떤 소설이길래… 궁금해 성급할 정도로 책장을 빨리 넘긴다. 태양이 강렬한 외진 여름 휴양지 속 캐릭터들의 농밀한 대화가 날 툭툭 친다. 바게트처럼 겉은 딱딱하나 풍미가 살아있는 프랑스풍 뉘앙스에 나는 빨려 들어간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두 부부(자크와 사라 부부, 루디와 지나 부부)와 독신녀 다이아나로 구성된 다섯 친구가 여름 휴가지에서 지내는 이틀을 다룬다. 개성을 존중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서로를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그들은 늘 함께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갇혀 사는 거다. 그러기에 외지로 통하는 길 하나를 갖춘 가장 폐쇄적이고 가장 무더우며 역사적 풍파가 끊이지 않았던 바닷가 작은 마을을 루디 따라 매년 찾는다.    

  

마을을 술렁이게 하는 지뢰제거반 청년의 폭사와 강 건너편 산불은 상식적 미덕을 지닌 그들의 밋밋한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들의 함께함에 동요가 이는 건 멋진 모터보트를 소유한 남자 휴양객이 사라와 가까워져서다. 남자의 배를 타고 바다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날에 그들의 불편한 심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휴가가 끝나기 전에 다른 여행지로 향하는 이탈자가 곧 나올 것처럼.

    

그런 내밀한 불화를 뒤라스는 형이상학적 직설적 화법으로 풀어 간다. 사라와 남자의 사랑을 용인하면서도 화해의 여지를 남기는 자크의 말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순 없어,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거야.”(237쪽)처럼. 인물들의 캐릭터와 대화가 오가는 맥락을 알아야 소통 가능한 뉘앙스다. 다이아나와 사귀면서도 불륜의 에로스와 서로의 속내에 밝은 부부애를 대비시켜 뜻을 전하는 자크의 역설적 애원이 묻어난다.    

  

이 소설은 흙길로 뻗은 휴가지의 외길과 내리쬐는 태양으로 불륜 같은 이탈을 부추기며 상존하는 삶의 틈새를 설정한다. 지나와 늘 다투며 그 틈새를 인지하는 루디도 자크처럼 오래된 사랑(부부애와 우정)을 편든다. 상대를 옥죄는 악의성도 사랑의 특성으로 수용하면서. 휴가 없는 사랑을 삶의 다면성에 비유하면서. 내 일상에 대화다운 대화가 부족하다는 걸 일깨우는 그런 감성적이면서 논리적인 발화들 몇을 예시한다. 

     

“어쩌면 오래된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악의적으로 만드는 건지도 몰라. 위대한 사랑의 황금 감옥 말이야. 사랑보다 우리를 더 옥죄는 감옥은 없지. 그렇게 오랜 세월 갇혀 있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까지 악의적인 사람이 돼 버려.”(295쪽)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306쪽)    

 

“아니긴, 네가 날 원망하는 게 이렇게 똑똑히 느껴지는데. 날 이해해줘. 나도 우리가 어느 선에선, 그러니까 잘못 표현하거나 거짓으로 말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선에선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 이전도, 이후도 아닌 딱 그 경계에서. 하지만 그래도 난 기를 쓰고 침묵을 고수하는 사람들보다 그 경계에 부딪쳐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 경계를 허물고 표현해 보려 애쓰는 사람들이 더 좋아. 그래, 어쨌든 나한텐 그 사람들이 더 나아 보여. 너는 적어도 일주일 전부터 나한테 품고 있는 감정을 말하지 않은 채 가슴에 담아 두고 있어. 난 그게 싫어. 너한테 상처가 될 테니까. 확신해.”(138~139쪽)     


제목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휴가가 끝나기 전에 자크 일행이 갈 수도 있는 타키니아의 에트루리아 고분에서 볼 수 있는 말들을 가리킨다. 불륜이나 이혼, 또는 별거를 꿈꾸다가도 각별한 애정을 자각하고 유보하는 오래된 부부 사이와 친구 사이를 표상하는 아름다운 형상이다. 그처럼 갇혀 있되 열린 관계를 지향하는 인물들의 풍미가 내게 짙은 여운을 남긴다. 얀 르메가 뒤라스와 함께한 게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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