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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Feb 07. 2021

해묵은 난제들을 때린 한방망이

[김유경의 책씻이] 소녀,여자,다른 사람들(버나딘 에바리스토 장편소설)

이 소설은 흑인 페미니스트 레즈비언들이 등장하는 영국 작품이다. 2019년 부커상 역사 최초로 흑인 여성 작가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내용이기도 하다. 작가나 등장인물들의 피부색이 도드라지듯 인종문제가 지구촌의 해묵은 난제들, 즉 가부장적 통념(젠더), 성소수자, 다문화가정, 빈부격차 등과 맞물려 전개된다. 그 삶의 그늘들을 흥미진진하게 엮은 솜씨가 놀랍다.  

   

총5장 구성인데, 제4장까지 3화자씩 12명의 삶을 얘기한다. 동일한 사건이나 현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재해석해 색다른 삶의 파동을 보여주는 문체가 호소력 있다. 장마다 첫 화자가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데, 제1장 첫 화자 앰마와 이런저런 인맥으로 얽힌 이야기들을 DNA 분석 카드로 마무리한 에필로그가 뜻밖이다. 날선 자아들이 여전한 연극 개막 뒤풀이식 지구촌을 때린 한방망이다. 

      

결말만큼 신선한 형식적 실험(퓨전 픽션fusion fiction, 일종의 산문시)도 눈에 띈다. 문장에 마침표가 없는. 한 문장이 하나의 문단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문장마다 들여쓰기를 행하거나, 여러 문장이 한 문단을 구성할 때는 마침표 대신 쉼표로 문장을 가른다. 그러다가 크든 작든 장(章)이 끝나는 마지막 문장에만 마침표가 있다. 또한 대화 구분도 없다.    

  

일례로, 고생 끝에 전설적 흑인 레즈비언 연극 감독으로 우뚝 선 50대 앰마가 동성애자 롤론드의 협조(정자은행을 통해)로 낳은 딸 야즈(기자를 꿈꾸는) 관련 부분을 소개한다. 정치적 각축장의 여파에 노출된 민생의 르포르타주로 여겨질 만한 문제의식이 소설의 옷을 빌려 생생한 독설로 펼쳐진다. 요즘 우리 언론 지형에서 일어나는 데스킹이 먹히지 않는 세대차 시각도 엿볼 수 있다. 

    

  엄청난 빚을 안고 대학을 나서면 미친 취업 경쟁이 기다릴 테고 저 바깥의 터무니없이 비싼 임대료는 곧 이들 세대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 영원히 거기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미래에 대한 더 큰 절망으로 이어질 것이고 게다가 곧 EU에서 분리될 영국 자체가 보수의 길로 질주하여 파시즘이 유행할 텐데 빌어먹을 세상에서 이런 영국과 함께 완전 폭망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너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라 영구 태닝한 역겨운 억만장자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지적 도덕적 수준의 새로운 최저 기준을 세우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은 나이 든 세대가 모든 걸 망쳐놓았으며 그녀 세대는 완전 대멸망이라는 의미

  일찌감치

  나이 든 사람들에게서 지적 통제권을 빼앗아오지 않는 한 (67쪽)   

  

내처 읽다보면 그 실험적 문맥들이 자연스럽다. 트랜스 여성(남성), 논바이너리(인도의 히즈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투스피릿 등), 퀴버젠더(젠더플루이드, 스태틱젠더, 싱크젠더 등), 젠더 프리, 젠더 확정, 라이엇 걸riot grrrl, 진정한 급진적 분리주의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우머니스트womanist 등 낯선 세계의 용어들을 쏟아내는 열두 화자 삶의 사회문화적 토양에 절로 눈뜨듯이.  


입양된 퍼넬러피는 80대에도 생물학적 부모가 궁금해 DNA 검사를 한다. 12명 중 유일한 백인 화자를 통해 작가는 백인조차 ‘아프리칸 디아스포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일깨운다. 앰마를 연결고리로 한 구성의 관계 그물이 4세대에 걸친 해묵은 편견들을 생생하게 전달했기에 아프리칸 디아스포라 카드는 실험적 문체만큼 신선한 인식 전환으로 근원적 치유를 꾀하자는 것일 수 있다.   

  

  유대인은 그렇다 치고, DNA에서 아프리카를 볼 거라고는 백만 년에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이 점이 가장 큰 충격이었다, 검사는 답을 주지 않았고 그녀는 숱한 질문에 직면했다  (621쪽)     


특정 문화가 휘발된 “오래되고 낡은 농가”의 자연스러움을 “자궁”으로 느끼는 건 출생지를 찾은 퍼넬러피만의 감성은 아니리라. 코로나19의 팬데믹에 포위된 지구촌민들의 자궁회귀본능이 곳곳에서 꿈틀댐도 그 삶과 동궤이리라. 암튼 지구촌의 고질병들을 재밌게 응시하게 한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끝 모를 비대면 사태에서 놓치기 쉬운 사회적 이슈들을 내 아픔처럼 느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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