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by 김유경

[김유경의 책씻이] 사라지는 나, <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문학동네, 2019)


출판사를 신뢰하지 않았으면 냉큼 책을 덮었으리라. 경우마다 나타나는 “그 성난 아일린”이 지긋지긋해서다. “그 성난 아일린”의 “그”라는 지시대명사가 암시하듯 <아일린>은 회고담 형식의 장편소설이다. 아일린의 속내를 내내 현미경으로 훑듯 까발리는 전개방식이 책읽기를 고역으로 만든다. 아일린의 데스마스크도 역겨운 판에, 그 속 칙칙한 내면풍경을 줄곧 들이미니 속이 뒤틀린다. 그런데... 참길 잘했다.


<아일린>의 화자는 일흔 넘은 리나다. 리나가 지금의 자기와 사뭇 다른 “오십 년 전” 자기를 돌아본다. 아일린이 리나로 개명한 인생의 변환기 “스물네 살” 겨울이 배경이다. 섭식장애, 만성변비, 죽은 모친의 옷 입기, 자기 몸을 잘 씻지 않는 것은 물론 설거지나 집안 청소도 게을리 함 등은 이웃의 중산층 생활양식과 많이 다르다. 배관에 문제 있는 아일린의 자동차처럼 누구 눈에도 탈(頉)이 예정돼 있다.


“나는 정말이지 지루하고 생기 없고 무엇에든 면역된 가식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항상 격분했고 부글부글 끓었으며 내달리는 생각과 살인자 같은 정신으로 살았다.”


평소 아일린이 안팎을 달리한다는 얘기다. 내색과 거리 먼 데스마스크가 날뛰는 욕망과 내적 파열을 가리고 있다. 그건 ‘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뚜렷한 자아분열이다. 좋게 보면, ‘보는 나’는 전직 경찰관 주정뱅이 아버지를 싫어도 돌봐야 하는 처지에서 터뜨릴 법한 막됨을 예방한다. 그런 자아분열이 남 보기에 홀연 종적을 감춘 아일린의 떠남을 사실 예비한다.


‘보는 나’는 불우한 가정환경에 파묻히지 않은 시선이자 숨통인 셈이다. 그건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은 것과 연계된다. 직장(소년 교도소)과 집 사이 동선만을 오가는 아일린에게 그 끈은 책과 성애다. 아버지가 비웃고 방해해도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를 주문해 구독하고, 근처 도서관에서 꾸준히 책을 빌린다. 제정신으로 살려는 에너지 보강이다. 직장동료 랜디를 향한 짝사랑은 잠재한 생명력의 발산이다.


그러하기에 두 끈은 암암리에 리베카의 탈출 의지를 강화한다. 소설에서 탈출의 도화선은 리베카다. 그녀는 하버드대 출신 신입 교도소 교육국장으로 꽤 미인이다. 아일린은 랜디마저 내치고 리베카에게 매료된다. 그러다 리베카의 “범죄 공모자”로 엮이게 된다. 아일린이 “입감 검사”와 “면회 업무”를 담당하다 관심 가진 리 포크에 대해 리베카가 개입해서다. 그 일을 겪으면서 아일린은 리베카에게 실망한다.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 이상주의는 제멋대로 큰 애새끼들의 한심한 꿈일 뿐이다.”


결박당한 리베카를 집 지하 저장고에 내팽개치고 집을 떠나는 결미는 예상 못한 클라이맥스이자 리나로의 화학적 변화가 완결된 지점이다. 그건 책 서두의 “현관문 위 처마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는데”를 복선으로 활용해 리나로의 물리적 변화를 꾀한 상상력과 한통속이다. 물론 그건 “그 성난 아일린”이 통찰 깃든 인간적 문장들로 갈음되는 책읽기 경험과도 내통한다.


이제 “모든 헛디딤과 뒤틀림이 적절히 예비된 옳은 길로 들어섰다고 믿는” 리나는 심하게 요동치던 아일린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일린>은 사라진 아일린, 즉 ‘사라지는 나’에 관한 얘기다. 이쯤에서 나는 ‘사라지는 나’를 겪는 무수한 나를 본다. 나는 ‘보는 나’와 ‘보이는 나’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다 휴전하기를 반복한다. 나는 진짜면서 가짜다.


나는 누구인가. 입체적 책읽기에 초대한 <아일린>의 저자 오테사 모시페그를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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