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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Jan 23. 2022

꽃 속에서 꽃이 피다

[김유경의 오늘] 엄마의 사경(寫經) 위에 사경하며

엄마는 입원 몇 개월 전까지 법화경을 사경했다. 5권 중 3권을 마쳤다. 더는 할 수 없다고 내쳤을 때, 난 아쉬움을 느꼈다. 속으로 ‘웬만하면 다 하시지...’를 삼키면서. 그런데 막상 내가 사경해 보니, 쉽지 않다. 원본 활자체를 비켜서 삐뚤빼뚤 쓰게 되고, 눈이 금방 뻑뻑해진다. 백내장 수술을 했음에도 눈 상태가 쾌청하지 않아서다. 엄마의 사경은, 같은 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본 상태를 거의 깨끗하게 유지하고 있어 놀랍다. 


엄마 사경( 아래는 내 사경)


엄마 사경 위에 덧대어 사경하며 엄마를 느낀다. 원본 활자체를 그대로 따르는 행위는 차분함 없이는 어렵다. 성급하게 글씨를 내갈기는 내 사경 탓에 원본은 바로 지저분해지니까. 치매를 앓는 엄마가 정신을 붙잡으려 꽤 애썼음을 알 수 있다. 평생 정도(正道)를 걸으려 했던 강한 의지의 소산이리라. 어쩌면 그게 엄마의 강박증을 심화시켰을 수도 있다. 구강 치료와 관련된 망상의 연유에도 그 특성이 반영되었을 수 있다. 


      

엄마가 정성스레 물 주던 작은 꽃나무에 꽃 여섯 개가 피었다. 두 개의 꽃잎으로 된 꽃들이다. 그런데 그 중 한 꽃에서 꽃잎 사이로 꽃대 두 개가 올라온 게 눈에 띄었다. ‘혹시’ 하며 며칠 지켜보니, ‘역시’ 두 꽃이 만개했다. 이 꽃나무와 십여 년 함께했지만, 처음 있는 일이다. 자연스레 ‘꽃 속에서 꽃이 피다’가 생각할 거리가 되었다. 그때부터 꽃이 식물 범주를 넘어섰다. 내 생활의식 전체가 참고 대상이다.



<중용>의 3강령이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다. 그걸 따르려면, 평소 꾸준히 성의(誠意)를 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만한 인격은 누구나 탐내는 출중한 꽃이다. 곡선이 직선들의 치밀한 구성임을 헤아릴 때, 원만함은 들쑥날쑥한 인성 심의식(心意識)을 연마한, 죽을 때까지 배우는 정중동(靜中動)의 일상이 만든 결과물이니 그렇다. 달리 말하면, 정해진 운명이란 없는 거다.


그렇게 볼 때, 고유 인성은 자기 심의식이 짓는 운명꽃이다. 발 딛고 선 환경에서 나름 자양분을 취하여 인격을 드러내며 어울리니까. 내가 엄마의 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꽃이 되기 쉬운 것처럼. 엄마의 사경에 덧대며,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엄마의 흔적을 따르거나 비켜가며 꾸려졌음을 알아챈다. 엄마는 늘 나보다 먼저 인생이란 경을 사경한 거다. 엄마 덕분에 나는 지금 생노병사에 대해, 길흉화복에 대해 새삼 골똘해진다. 

    

얼마 전 탄허 스님의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23권을 샀다. 한자에 문외한이면서 성격대로 덜컥 일낸 셈이다. 그래서 얻은 <주역선해3(周易禪解3)>을 곁들여,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을 찾아가며, 대충 훑는 재미로 날을 보낸다. <화엄경>과 <주역>의 공통된 조언을 <중용>이 방편으로 제시한 ‘성의’로 이해하면서. 그러니까 꽃씨가 꽃을 피우기도 어렵지만, 참꽃의 덕(꽃 속의 꽃)을 드러내기는 더 어렵다. 


엄마는 나를 늘 일깨웠다. 내 이름 ‘경(炅)’을 들먹이면서, 빛나야 한다고. 덕성을 키우라고 은근히 압박한 셈이다. 현대 과학은 인간마다 내뿜는 빛의 세기와 색상을 밝힐 수 있단다. 물론 빛의 밝기와 그 색상에 따라 좋고 나쁨이 갈리기는 한단다. 내가 매일 코를 빠뜨리고 있는 경들과 고전들은 결국 자리이타(自利利他)하는 덕성의 빛내기에 관한 내용들로 꽉 차 있다. 그건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도사 운운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리이타하는 빛은 자기가 빛(꽃)이라고 뽐내지 않는다. 아무리 월등한 빛이어도 그 하나가 현실세계를 밝히지는 못한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공자‧장자가 세상 구원을 당장 못했듯이. 그 빛의 역할은, 악전고투를 하면서도,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이롭도록 솔선수범으로써 돕는 데 있다. 정치인에게 대입하면, 사회 전반에 대해 빈틈없이 알면서 사회적 검증을 통해 정책을 수립하고 실시하려는 ‘성의’를 갖추어야 가능하다. 


며칠 전 면회했을 때 엄마는 잠깐잠깐 내 걱정을 했다. 곧바로 망상에 사로잡히기는 했어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 손을 맞대며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엄마가 입으로 낼 수 없는 말들이 눈빛에는 아직 담겨 있으니까. 간호사에게 이끌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엄마는 자꾸 뒤돌아서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아픈 중에도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다’를 전하는 몸짓이었다.  최소한 그런 자비심(빛)을 살펴 선택하는 유권자들이 대다수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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