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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Aug 08. 2022

엄마는 치매를 앓아도 평생 엄마다

[김유경의 책씻이]  <뇌과학자의 엄마, 치매에 걸리다>, 온조 아야코

“이런 건 태어나 처음이야.” 

“엄마 나이가 몇인데 처음이야?”


팔순 지난 어느 날부턴가 반복되는 엄마의 놀람에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는 걸 뻔히 보고서도 “아이 깜짝이야!” 화들짝 놀랄 때는 “엄마~ 나 들어오는 거 봤잖아?” 소리치며 화내기도 했다. 그 땐 몰랐다. 일상의 순간순간이 엄마에게 놀라운 겪음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코앞에 들이대야 엄마가 주의집중 할 수 있다는 걸.  


비 오는 날 번개 치고 천둥이 울리면, 엄마는 무서워했다. 그렇게 겁 많은 엄마는 그 낯선 순간들 속에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또 화내는 딸을 보면서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 즈음 엄마가 부탁했던 말, “내게 악 쓰지 마. 고분고분하게 말해.”를 뒤늦게 떠올렸다. 두려움이,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내 허튼 반응들이 망상을 부추기며 엄마를 좀먹었으리라.


 

뇌과학자의 상식


일본의 뇌과학자 온조 아야코의 <뇌과학자의 엄마, 치매에 걸리다>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읽다 보면 다시금 엄마를 향했던 내 언행들이 복기되어 나를 고문할 테니까. 나처럼 작가도 ‘설마 우리 엄마가’ 하며 뒤늦게 병원을 찾았고,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을 받았다. 내 엄마는 그 진단명 앞에 수식어 ‘상세불명의’가 더 붙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에서 기억 장애를 유발하는 건 해마의 위축이다. “상세불명의”는 MRI로 촬영한 뇌에서 해마의 이상이 제대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지금 엄마는 일상 언어 능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몸이 아파도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표현하지 못한다. 대신 불편한 부분들을 자꾸 문지른다. 매일 얼굴과 다리와 왼쪽 가슴을 문지른다.


“자꾸 만진다는 것은 확실히 불편함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106쪽


침대에 앉아만 있는 엄마에게 간호사가 걷기나 프로그램 요법 참여를 권유하면. 엄마는 대개 거부하거나 짜증낸다. 작가는 그런 행위를 ‘인지능력의 저하‘ 탓만이 아니라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 일을 피함으로써 자존심에 상처 입을 개연성을 줄이고, 자신 있는 일만 해서 나름의 만족감을 얻으려는 것”으로 해석한다. 


내게 “난 이제 바보야.” 선언하던 자존심 강한 엄마의 절망이 되짚어진다. “다 모른다”는 우울감과 두려움이 극도에 이르면 엄마는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진정제 투약 횟수가 잦아진 엄마의 고요함은 이런저런 장애에 갇힌 자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지켜보는 ‘태풍의 눈’이다. 40분 간 세수하는 걸 말린 간병인을 수건으로 때리며 욕했다는 걸 듣은 날, 나는 울었다.   


“감정이 없으면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177쪽


“감정은 이성만으로는 도저히 대응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인간을 움직이게 하고 의사결정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180쪽


작가는 뇌과학자의 상식이라며, 감정을 이성과 윤리적 행동으로 이끄는, “죽기 전까지 남아 있는 이 적응력”으로 소개했다. 치매 환자의 과도한 감정 표출을 따뜻한 시선으로 살펴 새로운 도전을 꾀하게끔 하라고 권유했다. 내겐 가뭄의 단비 같았다. 엄마의 문제적 감정 폭발을 망상적 행위로만 규정짓지 말고, 자존감을 살리는 계기로 삼으라는 열린 메시지로 다가왔다.



엄마가 이곳에 있다


지난 7월 마지막 대면 면회 시 엄마의 명징한 인식을 마주하고 당황했다. 화를 내면서도 앞뒤 정황을 조합한 항의와 요구였다. 의료진이나 간병인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를 내게만 드러낸 내용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망상에 사로잡혀 간병인에게 ‘도둑X'이라 욕하며 소리치는 치매 환자 같지 않았다. 


엄마는 듣기 좋은 빈말이나 얼렁뚱땅 넘기는 대꾸에는 화를 냈다. 난 그런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며칠 전 넘어진 걸 기억 못하는 어리둥절함을 바라보며 얼떨떨했다. 그날 막무가내로 집에 가겠다는 엄마를 가라앉힌 건 내가 아프다는 말 한마디였다. 엄마가 입원할 무렵, 내 몸 여기저기에 탈이 났던 걸 기억하는 거였다. 날 사랑하는 엄마가 그 순간 거기 있었다. 


“엄마는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인지능력이 만드는 ‘그 사람다움’ 외에 감정이 만드는 ‘그 사람다움’이 있는 것이다.” 201~202쪽


간호사들은 내가 엄마와 면회하거나 통화하는 걸 걱정하곤 한다. 면회 후 엄마가 불안정할 때가 많다면서. 나는 경청하면서도 무자극보다는 자극을 택했다. 엄마의 신경회로를 조금이라도 활성화시킬 수 있다 여겨서. 그러던 차에 치매 환자가 어쩌다 보이는 “소소하게 밝은 인식”을 자존감 있게 살 힘의 감정과 연계해 응시한 작가를 대하니 힘이 났다. 


엄마는 간식 같은 개인사물에 남이 손대는 걸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병동 사람들에게 자기 간식을 다 나누어준다. 자기 결정을 실감하며 인정 많았던 평소 인격을 유지하는 듯했다. 잠시 후에는 그 사실을 잊고, 누가 훔쳐갔다고 소란을 피우긴 해도. 나는 그렇게라도 엄마의 사람다운 감정이 발달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화장 같은 몸의 “절차 기억”도 계속되면 좋겠다.



칸트조차 걸리는 병


집을 수리하는 동안 맡긴 옷들을 찾으러 세탁소에 갔다. 엄마의 안부를 물은 주인장이 말했다. 긴 머리를 자르니 어머니를 많이 닮은 게 느껴진다고. 특별히 멋 부리지 않으셨어도 고상한 분이셨다고. 엄마를 닮았다는 말에 축 늘어졌던 어깨가 펴졌다. 다음 통화할 때 어떻게든 이 마음을 꼭 전해야겠다.


현관에 들어서니 문자메시지 알림이 들린다. 종종 경찰청에서 보내는 실종 노인 찾기다. 남 일 같지 않아 인상착의 등을 확인한다. 엄마의 배회증이 겁나 나는 입원을 서둘렀으니까. 독박 간병이어서 경제적 부담이 크지만, 엄마만 괜찮다면, 이렇게라도 엄마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 엄마도 칸트처럼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칸트는 ‘인간은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까’와 인간의 ‘이성’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고민했던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도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에 ‘칸트조차 걸리는 병이라면, 누가 걸린 들 어쩔 수 없다!’고 조금 위안을 얻기도 한다. 사람이 치매에 걸리는 이유는 게으르고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다.” 147쪽   


엄마의 일기를 보면, 엄마는 노년과 죽음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꾸준히 한 것 같다. 두려움 앞에서,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엄마가 꿋꿋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아울러 장차 엄마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게 되더라도, 작가가 귀띔한 홋카이도에 살았던 아이누 민족처럼, ‘신의 언어를 말하게 되었다’며 엄마를 소중히 대하기로 맘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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