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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Sep 18. 2022

제3차 페스트 대유행에 투영된 인류 흑역사

[김유경의 책씻이] <페스트의 밤>(오르한파묵, 민음사, 2022.)

독보적 패데믹 소설  

   

침침한 눈으로 800쪽에 육박하는 책을 읽는 건 내게 무리다. 더구나 제목에 명시된 페스트는 시대착오적으로 다가올 만큼 옛적 활발하던 병원균이다. 나는 오르한 파묵 소설의 유려한 칼잡이 필치를 떠올리고서야 <페스트의 밤>을 집어 든다. 정치사회학적 응시로 행해지는 그의 책쓰기가 이번에 가리키는 것은 뭘까 궁금해 하면서. 이러저러하게 역사를 강조한 서문에서부터 내 상상력은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기 시작한다.   

   

코로나19 이전 인류 최대 팬데믹은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페스트의 속칭)이다. 오르한 파묵의 <페스트의 밤>은 페스트 제3차 대유행 시기인 오스만 제국 말기를 배경으로 한다. ‘비전통 안보 위험(Non-Traditional Security Threat)’의 팬데믹으로 진전될까봐 행해진 국제 공조와, 그 탓에 고립되어 “페스트와 정치적 유혈 충돌의 문턱에 선”(108쪽) 민게르섬의 방역 문제가 코로나19 팬데믹의 국내외적 현상과 오버랩되면서 책읽기를 실감나게 한다.  

    

그 실감이 놀라운 건, 2021년에 출간된 이 소설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2016년부터 쓰여졌다는 데 있다. 그건 작가의 예지라기보다, 되풀이되는 인류 흑역사를 향한 질긴 관심의 산물이리라. <고요한 집>과 <하얀 성>과는 다르게 전염병을 중심축으로 한 게 독보적 팬데믹 소설로 부각됐을 뿐이다. 암튼 감염자 동선 파악과 감염 경로를 밝히는 “아주 중요한 역학인 ‘전염병학’”(230쪽) 대목은, K방역의 핵심인 ICT(정보통신기술) 활용과 빅브라더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전염병 감염률을 높이는 공동체 분열   

  

터키산 작가 오르한 파묵은 조국에 대해 다각도로 앵글을 맞춘다. 이번 판타지 역사 소설 형식은, 자연스런 객관적 거리두기 장치로 작동하면서 오스만 제국 말기의 국내외적 각축적 정황을 현장감 넘치게 보여준다. 또한 주요 등장인물 파키제 술탄의 113통의 편지를 고증했다는 설정은, 상상의 섬 ‘민게르’ 픽션이 놓칠 수도 있는 역사적 설득력을 보강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일깨운 형용 모순의 냉정한 역설, 즉 ‘연대하는 각자도생적 삶 꾀하기’가 예나 지금이나 불가피함을 편들면서.  

    

“본코프스키 파샤는 거리두기, 격리, 방역을 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쥐들과 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독액을 뿌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곳들은 군인들을 투입해 싸우도록 한 후 소각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보셨습니다. 우리 파디샤께서는 칠 년 전 위스퀴다르와 이즈미트에 콜레라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감염된 집들을 비우고 불태워 마을 전체가 잿더미로 변한 후에야 퇴치된 것을 주시하셨습니다.”(159쪽~160쪽)     


소설의 ‘과학 방역’ 조치들은 “민게르 사람이 우선이 아니라 국가를 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188쪽)로 수용된다. 또한 “방역이 섬의 기독교인들을 학대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196쪽)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나 뇌피셜을 조장하며 민게르의 페스트 확산에 기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네 광화문 광장에서도 볼 수 있었던, “신 이외에 다른 피신처가 없다는 식의 운명론적이고 경건하고 패배주의적 관점”(597쪽)이 득세하다가 물러나면서 감염률이 잦아든다.  



지금 여기를 부정하는 오래된 미래   

  

이 소설은 또한 액자 형식을 통해 작가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작품 속 작가는 “내 증조할머니인 여왕 파키제 술탄과 증조할아버지 의사 누리”(723쪽)의 증손녀다. 민게르섬에서 아동기를 보내며 민게르어를 익힌 역사학자다. 그렇기에 잔존하는 민게르어로는 문장 구성이 안 됨을 알고 있다. 민족어를 잃은 민족주의는 모래성과 같기에, 작품 말미를 장식한 그녀의 민게르 찬양은 공허하다. 지휘관 부부의 생전을 그리운 ‘오래된 미래’로 의식화한 민게르의 불안을 암시할 뿐이다. 

      

“지금이 역사 속 개인의 위치에 관해 한두 마디 하기에 적절한 순간인 듯하다. 지휘관 캬밀의 아내 제이넵이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그 결과로 일어난 많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역사는 완전히 다른 경로로 흘러갔을까? 아니면 역사가 민게르섬을 위해 연출한 피할 수 없는 전개 상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개되었을까? 이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권력 공백과 무정부 상태가 도시를 지배하는 동안 민게르 언어와 아내에 대한 지휘관의 집착은 무정부 상태와 무질서한 분위기를 악화시켰을 뿐이고, 더 중요하게는 새로운 국가의 희망과 낙관론이 빠르게 사라지는 원인이 되었다.”(578쪽)     


대개 역사는 공적 위치에 있는 중요 인물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음을 입증한다. 민게르의 현재는 투옥과 감시와 검열이 항다반사다. 전염병 대유행은 지나갔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유・무형의 폭압은 사라지지 않은 거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지구촌의 삶에 미친 영향이 물리적 삶의 방식에는 빨리 나타났지만, 정신적 삶의 토양 변화에는 좀체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할 때 민게르의 ‘오래된 미래’ 교육은, 그물에 걸려 발버둥치는 불안한 현실 인식에 다름 아니다.      


시공간 유형과 상관없이 ‘오래된 미래’는 지금 여기를 부정한다. 원하는 미래는 그리움으로써가 아니라 현재의 길 닦음으로써만 구현할 수 있다. 더군다나 팬데믹을 일으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인간 존재보다 더 오래 살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민게르는, 불시에 코앞에 들이닥친 페스트로 인해 빈부귀천과 종교를 구별 않는 죽음을 목격한 충격을 교훈 삼아,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 간의 갈등 같은 인류 흑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지혜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페스트의 밤>을 덮으며 나는 문득 골똘해진다. 지금 지구촌 발등에 떨어진 불, 즉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기후 위기, 가뭄 등등의 재앙 앞에서 인류는 어떤 역사를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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