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영화만평] 에로스 신화를 오마주하다, <나의 사랑 그리스>
원래 제목은 Worlds Apart(2015)다. 분명 개별적이나 처음부터 연결 고리를 지닌 이야기가 아테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골치 아픈 동시대적 난제, 즉 유럽판 금융 위기와 지구촌 난민 문제를 도마 위에 올려 흥미진진하게 세 에피소드(부메랑, 로제프트50mg, 세컨드 찬스)로 토막쳤다가 합성한다. 그걸 한 가족 구성원별 별일로 꾸민 게 영화적이지만, 개인별 세대별 갈등이 그래서 더 구체적이고 첨예하게 드러난다.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 감독은 2015년 구제금융 협상안을 받아들인 그리스의 가혹한 긴축정책을 정리 해고에 부대끼어 신음하거나 자살하는 장면들로써 압축해 재현한다. 그 판에 끼인 40대 남녀의 사랑은 앞길이 막막하다. 불만에 찬 그리스인들의 화풀이 대상인 난민이어서 애태우는 두 20대 젊은 피의 사랑보다 더 방어적인 탓이다. 감독은 그리스 에로스 신화의 고난을 그렇게 시사적으로 각색한다.
에로스 신화는 해피엔딩이다. 영화에서 그 몫은 60대 세바스찬(J. K. 시몬스 분)과 마리아(마리아 카보이아니 분)의 사랑이 꿰찬다. 깜깜한 1년을 통과한 재회긴 해도. 그런 의미에서 ‘세컨드 찬스’는 중의적이다. 인생 2막이라는 노년의 사랑이기도 하고, 두 노년이 맞이하는 두 번째 기회이기도 하다. 암튼 영화 속 난제처럼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과 외환위기 재발 가능성 논란이 우리네 포털사이트에서 오르내리는 지금 <나의 사랑 그리스>가 내게 먹힌다.
첫 번째 토막 ‘부메랑’은 에로스 신화를 좋아하는 시리아 난민 예술 전공 파리스(타우픽 바롬 분)와 그리스 여대생 정치학 전공 다프네(니키 바칼리 분)를 비춘다. 파시즘에 꽂힌 아버지가 바다로 던진 부메랑이 되돌아오는 장면이, 파시스트의 총에 맞은 다프네를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엔딩의 복선이다. 두려워하면서도 풋풋하게 온몸으로 사랑을 터뜨리는 과감한 소통이 낭만적이다. 영화는 현실 개선을 부추길 수도 있는 낭만에 대하여 프시케가 맞은 죽음의 잠을 상기시킨다.
두 번째 토막 ‘로제프트 50mg’은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지오르고(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 분)와 그와 딴판으로 사는 덴마크인 상사 엘리제(안드레아 오스바트 분)에게 앵글을 맞춘다. 원나잇스탠딩의 해프닝이 사랑으로 발전하자 사랑과 커리어를 다 포기하고 귀국길에 오른 엘리제가 같은 약을 먹는다. 정리 해고 대상이 된 남자와 그 회사에 파견되어 해고 리스트를 작성하고 처리하는 여자의 사랑은, 서로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자기에게 드리운 우울을 넘어서지 못한다.
세 번째 토막 ‘세컨드 찬스’는 퇴직한 독일 역사학자 세바스찬과 그리스인 전업주부 마리아가 빚는 사랑이다. 여생에서 빼앗길 것도 빼앗을 것도 없는 세바스찬은 그리스가 좋아 새 둥지를 튼 그리스의 도서관에서 일한다. 마리아는 자기가 엄두를 못 내는 과일과 유제품을 잔뜩 산 독일인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다가 부지불식간에 그의 페이스로 끌려 들어간다. 에로스 신화를 마리아에게 일깨운 세바스찬이, 죽음의 잠에 앗긴 프시케를 깨우는, 에로스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개봉 제목 <나의 사랑 그리스>의 “나”는 그리스인을 사랑하게 된 파리스와 엘리제 및 세바스찬이다. 세 이방인 중 세바스찬의 사랑만이 현재진행형이다. 격정과 고뇌의 우울에서 자유로운 세바스찬의 그윽한 눈빛과 잔잔한 미소가 나를 매료시킨다. 물론 세바스찬과 마리아의 재회에는 지오르고가 한몫한다. 세바스찬이 마리아에게 건넨 책 ‘세컨드 찬스’에 지오르고가 공감해서다.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나비효과는 대개 부정적인 큰 결과에 대하여 쓰인다. 그와 달리, 그리스 도마에서 행해진 세 토막의 꿈틀댐이 지구촌에 암암리에 퍼져 타자(국)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키우는 시너지의 날갯짓이 될 수 있을까. 지구촌 개개인이, 잇따른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하는 에로스가 되거나, 에로스에 공감하는 지오르고가 돼야 가능하지 않을까. 진부한 만큼 절실하고 소중한 에로스를 오마주해 재미와 시사성과 영화적 드로잉을 아우른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