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대신 휴직
기나긴 인생 중 1년쯤은
이런저런 눈치에서 벗어나 내가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내 시간을 허락받고 싶었다.
아이가 8살이 되던 그 해...
마흔 입장을 앞두고 있던 그 해...
불혹과 반대로 스치는 말들에도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생채기 난 마음은 이 생각 저 생각을 끌어와 불행한 감정의 씨앗이 되어주곤 했다.
모든 것들에 대해 더는 노력하고 싶지 않아 졌다.
그럴수록 아이를 두고 출근하는 시간이 더욱더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의미 부여되지 못한 노동의 가치는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고, 회사를 다니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끝도 없이 채워져 갔다.
아이 등하교를 해주지 못하는 아쉬움
학원 가기 전 간식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아쉬움
아플 때 푹 쉬게 해주지 못하는 아쉬움
엄마표 공부를 해보지 못하는 아쉬움
다양한 음식을 차려주지 못하는 아쉬움
어둠이 밀려오기 전에 아이의 하루 일과를 들어주지 못하는 아쉬움
따뜻한 목소리와 여유로 아침을 깨워주지 못하는 아쉬움
도서관에 가서 원 없이 책 고르게 해주지 못하는 아쉬움
놀이터에서 맘껏 뛰놀게 지켜봐 주지 못하는 아쉬움
건강을 챙기지 못하는 아쉬움
하고픈 일들을 머릿속에 쌓아만 두고 실천하지 못하는 아쉬움
평일 오전 강좌를 들을 수 없는 아쉬움
한가로이 산책할 수 없는 아쉬움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지 못하는 아쉬움
결국 내 시간을 멈추고 싶게 만든 그것은 "아쉬움"
바로 그것이었다.
나와 우리 가족의 젊은 순간 대한 아쉬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이 시간을 흘려보내면 미련이 커지고 그것이 후회를 남길 것 같아 두려웠다.
결국 용기 냈다.
기나긴 인생 중 1년쯤은
이런저런 눈치에서 벗어나 내가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내 시간을 허락받고 싶었다.
그 선물 같은 시간을 그동안 고생한 나와 가정에 허락하고 싶었다.
팀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극소수의 인원으로 해가는지 알기에
나처럼 버티는 선배 워킹맘의 노고를 누구보다 알기에 나의 쉼은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난 이 순간 그 누구보다 이기적이기로 결심했다.
[ 출근길, 엄마의 마음 01화 도돌이표(프롤로그) 中 ]
직속 임원께 휴직 인사를 드리러 가는 날, 배 부른 임산부가 아닌 상태로 육아휴직을 다녀오겠다고 말하려니 입이 안 떨어져 어버버거렸다.
이기적인 회사원의 마음과 엄마의 죄책감의 양가감정이 뒤엉켜졌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보다 변하지 않고 버티기가 더 익숙하고 편했던 나는 문득문득 내 결정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렇게 도망치듯 떠나고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정말 오기 싫어서 휴직 후 퇴사하게 되면 휴직 기간 동안 인원 충원 없이 버텨 낸 팀원들에게 얼마나 더 민폐가 될까?
무거운 마음과 일 년의 쉼이 뭘 얼마나 달라지게 하겠냐는 의심의 생각을 애써 덮어두고 소중한 일 년을 도약의 시간으로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채워봤다.
마흔의 시작이 상실감에서 설렘으로 바뀌는 듯했다.
팔자주름이 깊어지고 지난주 본 흰머리 한가닥 옆에 또 다른 흰머리 한가닥이 추가 됐지만 늙어가는 시간이 잠시 멈춘 듯 착각이 들었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늘 불안했는데,
이제는 알 수 없는 미래가 설렘을 준다.
그토록 갈망했던
워킹맘의 제약 사항에서 벗어날 시간
난 그 시간을 온전히 느끼고 잊지 않게 기록할 것이다.
복직하게 된다면 이 기록은 퇴사 욕구가 솟구치는 시점에 꺼내 볼 경험 상자가 될 것이다.
퇴사와 복직...
어느 쪽이든 나의 흘러가는 인생이다.
어느 방향이든 내가 결정한다. (눈치보기 금지!!)
번아웃이, 쉬어가라는 신호처럼 여겨져 감사함이 밀려온다.
그날부터 난 초록 잎사귀도 보았고, 바람의 냄새도 맡았고, 구름의 속도도 보았다. 일상이 여유와 감사와 행복으로 채워져 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