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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급 휴직자의 일상

육아 휴직 본론

by crystal

휴직자가 하고 있는 그 일은

나의 자유 의지로 시작된 것들이고

내가 멈추고자 하면 언제든 중단할 수 있는 그런 일이었다.


운전대가 내게 주어져야 비로소 내 인생을 산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려간다.



두어 달 지나고 나니 집에 있는 시간에 익숙함이 스며들고 있었다.

휴직 첫 달과 다르게 월급 통장의 입금 알림만 고요해졌다. (익숙함으로 감사함을 놓치고 있었던) 그것이 중단되고 나니, 생필품이 떨어지는 주기가 더 빨리 오는 것 같았고 지난주 보다 오른 대파 가격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정비는 어쩔 수 없다 여기고 지출 계획을 빠듯하게 세워뒀지만 뭉칫돈 요구하며 투척되는 세금과 자동차 보험료는 그 계획을 쓸모없게 만들곤 했다. 그간 맞벌이로 벌어들인 수입이 풍족함을 주기에는 미약했으나 소소하게나마 쌓여 가고 있어 부족함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경조사를 축복과 위로의 감정으로 맞이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비용부터 떠올리다 밀려오는 한숨을 내쉬면서 달라진 상황을 마주하곤 했다. 결국 반토막 난 수입으로 인해 곳간 채우기보다는 빼먹지 않기에 초점 맞추게 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일장일단이 있다는 말처럼
세상에 근심 없는 사람 없다는 말처럼
업무로 인한 골머리 앓기가 희미해지니, 돈으로 인한 골머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합리적인 소비가 필요했다. 가장 먼저 긴축에 들어간 건 나에게 투자되는 비용이었다.

습관적으로 하루 한잔 사 먹던 아메리카노 자리를 마트에서 대량 구매한 알커피 100봉이 대신해 줬다.

결혼 이후 처음으로 끊어둔 피부 관리 10회권은 더 연장하지 못하고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그라졌고 그 자리를 그간 쌓아 둔 화장품 샘플로 채워 넣었다. 매일 다른 옷 입고 출근하는 낙으로 이 아이템 저 아이템 구매한 탓에 옷장이 포화 상태였는데, 이제는 교복 마냥 두어 벌 번갈아 입다 보니 옷장도 일상도 단순화되는 것 같았다.

영혼까지 탈탈 털리도록 회사 업무로 시달리고 나면 저녁밥은 외식으로 대신하기 일쑤 었다. 이로 인해 진열대에서 이것저것 비교하며 고른 요리 재료는 심사숙고의 시간을 허망하게 만들도록 냉장고에서 종종 사망하곤 했는데, 이제는 자투리 야채를 모아두고 없어서 못쓰는 지경에 다다랐다. 건강도 지구 환경도 함께 지켜가는 일거양득이었다.


곳간이 비워지고 일상은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어느덧 개학과 함께 아이의 새 학기가 시작됐다.

새 학기마다 한 달은 긴장하고 어려워하는 모습이 보이는 아이인데 이번 3월은 달랐다. 아침에 배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매일 엄마 손을 잡고 등교하고 교문 앞에서 인사하고 가면서 아이의 긴장되는 마음도 사그라들었나 보다고 여겼다.


일상에 여유로움이 스며드니 그제야 해보고 싶은 것들이 하나 둘 생겼다.

돈 쓰지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일...


아이를 등교시키고 각 잡힌 가죽 가방 대신 헐렁한 에코백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평소에 가보지 못했던 근교 도서관을 도장 깨기 하고픈 마음이었다. 주말 일정을 쪼개서 도서관에 대출/반납을 하러 가는 것과 마음가짐이 달랐다. 검색한 책을 빌려오는 방식에서 여유롭게 서가를 탐색하다 다양한 책을 빌려오도록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아이 책과 내 책을 에코백에 넣어 싣고 나르며 업무 지식이 아닌 세상의 다양한 글을 채워 넣었다.


일주일 중 이틀은 도서관 대신 필라테스로 하루를 시작했다. 마흔 되도록 제대로운동 한번 해본 적 없던 내 세상에 변화가 시작 됐다. 안 그래도 힘든데 왜 몸을 더 힘들 게 하는지 이해되지 않던 세상에서 운동 후 개운함을 깨우쳐 가는 세상으로 바꿔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씩 그 기분을 알아차려 가는 게 기특하고 신기했다.


내친김에 자신감을 얻어 수영도 시작했다. 계곡물에 빠져 고요함 속 허우적 거림을 경험한 내게 물은 극복 어려운 존재였다. 물 공포증 때문에 몰디브까지 가서도 수영복을 입지 못했던 내가 물속에 얼굴을 담그고 음파를 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었다. 도전은 6개월 간 유지 되었었고 주 3회 수영 강습을 받았지만 끝내 킥만은 놓지 못했다. 수영장에서 최장 기간 자유형 강습생이 된 듯하나, 거북이 등을 달고 시작해 땅콩 킥판으로 업그레이드된 것 자체가 내겐 큰 수확이다. 도전 자체가 내게 수확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일 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나의 오래된 친구를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나고...

일 년에 한 권 읽기도 힘들었던 책을 읽어보겠다고 독서 모임에 가입해 완독 도서 목록을 적립해 가고...

무료 강연을 쫓아다니며 업무 대신 주옥같은 강연 내용을 기록해 나간다. 지독한 자기 검열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던 회의 시간과 달리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나를 보며 낯섦을 경험했다. 한 번은 출퇴근 길 위안을 주던 유투버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생겼는데, 한 시간 전에 미리 가서 그녀의 책을 들고 사인받았다. 내게 이런 열정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걸 느끼는 게 참 신기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던 나는 자꾸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휴직자가 하고 있는 그 일은

나의 자유 의지로 시작된 것들이고

내가 멈추고자 하면 언제든 중단할 수 있는 그런 일이었다.



운전대가 내게 주어져야 비로소 내 인생을 산다는 느낌도 갖게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려간다.





평일에 가보지 못한 공간에 아이 손을 잡고 이곳저곳 발길 닿는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시간

내 공간을 늘 말끔하게 정리해 두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

연락할 틈이 없어서 놓치고 살았다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연락해 볼 수 있는 시간


일상의 시간에 여유로움이 채워지고 그 자리에 감사함이 더해져 간다.


평화와 감사를 애써 느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하루에서 수십 번 느껴졌고,

나무와 바람과 해돋이 시간의 변화를 느껴가며 계절의 변화도 함께 느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게 제법 보이기 시작했고,

그토록 빨리만 흐르던 시간의 속도가 느긋해졌다.


예상을 빗나가는 더 큰 행복의 시간이다.

비워진 곳간이 여유로움으로 보상받아지는 시간이다.


(아직은 곳간 상태가 버틸만하니 여유로움에 심취하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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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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