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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May 13. 2016

널 어쩌면 좋니

육아의 늪에서 길을 잃다


예전 어린이집을 다닐 때였다. 하원을 위해 데리러 가는 저녁시간이면 담임선생님은 변을 본 아이의 뒤처리를 하고 계셨다. 세 번에 한 번꼴이었으니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을 테고 늘 목욕탕으로 데려가 물로 씻겨주셨기에 선생님께 가장 미안한 일 중 하나로 기억된다.


"배변 훈련을 부탁드립니다." 조심스레 요청하시다가도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내게 "음, 언젠가 하겠죠. 어머님"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으시던 선생님의 배려가 참 많이 고마웠었다.


다른 아이들의 배변 훈련이 잘 되고 있는지 묻지는 않았다. 비교할 필요도 없었고 아이의 템포에 맞춰가고 싶었던지라 특별히 재촉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나의 여유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였고 남의 손을 빌려 아이를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 무조건 내 원칙만 고수할 수는 없었다.


옆집에 모여 함께 먹고 놀다 모임이 파하는 시간은 어느새 아이가 변을 봐버리는 순간으로 정해졌다. 아이를 들쳐 안고 "집에 갈 시간이네. 다음에 보자." 하고 급하게 빠져나오려면 하던 일을 모두 멈추는 동시에 치울 건 치워야 해서 정말 정신이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야 빤하니 서로 말없이 이해해주고 웃어넘겼지만 남의 집에서 변을 봐버리는 아이 때문에 민망하고 속이 상했다. 갑자기 헤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 집에 가서 씻겨서 다시 오기도 하고 그 집 화장실을 눈치껏 이용해봐도 번거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언제 있을지 모를 '볼 일' 때문에 하루 종일 기저귀를 채울 수는 없었다. 아무리 고급 기저귀라도 땀이 차고 바지 안이 묵직하게 꽉 차 걷고 뛰어야 하는 아이의 행동을 제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부 가려움증이 생기면서부터는 밤에만 채우는 기저귀에도 답답함을 느끼는 아이였다.


이제는 변을 보는 시간이 일정 시간으로 한정되어 나와의 문제로 좁혀지자 나는 더욱더 하고 싶은 잔소리를 아꼈다.


문제는 외출에 제약을 받는 부분이었다. 퇴근을 일찍 하는 날이면 저녁시간을 이용해 마트에서 장도 보고 백화점에 여유롭게 들리고 싶어도 아이가 변을 봐버리는 시간이 딱 그 시간이라 꼼짝없이 집으로 와야만 했다.


마음에 여유를 갖고 내 선에서 기다려 줄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연장시켰다. '세 돌 생일까지만 떼면 되지.' 예정대로 된다면 나중에 들려줄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생겨나는 거라며 긍정적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는 시간이었지만 절묘한 타이밍이란 쉽게 와주질 않았다. 그렇게 생일은 지났다.  

  

절차와 시기를 맞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잘 수행해오던 아이는 비록 말이 좀 늦긴 했어도 큰 걱정 끼친 적이 없었는데 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 불편한 일이라 조금씩 지쳐갔다. 어떻게 해서라도 변을 떼야겠다는 생각은 그렇게 점점 확고해졌다.

   

좋은 말로 구슬리는 건 수천 번도 더 한 것 같다. 실수할 수 있어. 별 일 아니니 내일은 해보는 거다 격려는 더 많이 했을 거다. 선물 주면서 약속도 받아내고 회유도 해보고 엄마 너무 힘들다고 애원도 해봤다. 엄마가 닦아주고 빨고 치우느라 너랑 놀아줄 시간이 없어진다고 설명을 가장한 협박도 해봤다.


변은 어디서 보는 거지? “변기통이요!” 언제나 대답은 기가 막히게 잘했다. 머리로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그 과정이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갔다. 이건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니?    

 

두 돌이 지날 무렵 쉬를 먼저 가릴 때도 어린이집 선생님의 부탁이 있었다. 그래서 혼자 지나가는 말로 기저귀 값 드는 거 아까우니까 이제 그만 그 돈으로 딴 거 사자 했더니 "네"라고 답했었다.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은 거처럼 바로 오줌 기저귀를 떼 버린 아이를 보며 변도 쉽게 떼겠구나 싶었는데 그때와는 전혀 딴판인 상황을 마주하니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정말 그 속을 알 길이 없었다.


말로만 구슬리고 회유한 것도 아니었다. 아기 변기를 사서 의자처럼 앉는 연습을 미리 하다 보면 그 자리가 익숙하고 편해진다고 해서 그대로 해봤고 배변훈련과 관련된 책들 중 유명하다는 건 보이는 대로 구입해서 읽어주었다.


아이는 자기 몸에서 나온 것에도 소유욕을 느낀다는 말에 감탄하며 함께 물을 내리며 변과 헤어지는 인사도 해봤다. 어른용 변기는 딱딱하고 무서울 수 있으니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로 된 푹신한 변기 쿠션도 놓아주었다.


그러나, 전부 소용이 없었다.   

      

변을 봐놓고 당황해서 주저앉아 있는 모습, 불편한데 어쩌지도 못하고 나지막이 “엄마 엄마” 부르며 어기적 걷던 모습에, 지는 또 얼마나 놀라고 주눅이 들까 그렇게 안쓰럽고 짠해서 아이가 느끼는 것보다 더 깊은 아이의 마음으로 이해를 한 게 잘못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아이는 엄마의 이해를 알아채고는 그냥 씩 웃거나 내가 가만있는데 똥이 뽕하고 나왔다느니 밥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느니 변명이 늘고 히죽히죽 변죽만 좋아졌다. 심지어 “내일은 힘내 볼게요.” 하며 씻겨주기 위해 들쳐 안고 화장실로 향하는 엄마를 위로까지 했다. 혼 구멍을 내서라도 변은 확 땠어야 하는 건데 후회막심이었다.    

    

언제쯤 화장실에서 변을 보게 될까? 몇 년 뒤면 배변훈련쯤은 기억이 안 날 만큼 사소한 일이 되어 버리겠지?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와 무얼 그리 안달을 냈나 하며 웃어넘길 날도 있겠지.


길고 긴 인생에 그리고 성취해내야 할 많은 일 중에 모래알처럼 작은 일일 뿐인 배변훈련이란 걸 잘 알지만 지금 그 시간을 지나고 있는 나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 들어 힘이 나질 않았다. 머리로 안다고 수월해지는 건 아니었다.


조급해하지도 않고 아이를 몰아세우지도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고 싶은데 가능하다면 나는 '교체 찬스'라는 걸 쓰고 싶다. 나중에 한글 늦게 떼고 구구단 못 외워도 절대 구박하지 않을 테니 변 가리는 거랑 바꾸기 찬스! 딱 한 번 다른 거와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순 없을까? 부질없지만 절실한 소원 하나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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