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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ul 07. 2021

퇴사 대신 다이어트

퇴사를 유보케 한 현실적 이유 세 가지

승진에 떨어졌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어떤 영향력이 발휘되는지 모른 채 결과가 나오길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전 직장에서 대리로 퇴사하고 이 회사에 들어온 지 12년 차 나는 아직도 대리다. 대단한 승진도 아니고 고작 과장 승진인데 연차 차면 된다는 이 승진이 나에게는 쉽지가 않다. 특히나 이번 인사에서의 승진 누락은 예상을 못한 정도를 넘어서 손에 들어와 쥐고 있던 걸 빼앗긴 기분까지 들었다. 회사가 나쁜 건 아니다. 2년 간 육아휴직 후 올 초 복귀한 직원도 승진 명단에 있으니 회사는 참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저 승진을 할 경우 이렇게까지 늦게 얻은 과장 타이틀을 과연 누구에게 가장 감사해야 할지 마치 수상소감 짜듯 혼자 생각을 정리해 본 내가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한 가지 더 재미난 사실은 현재 나는 우리 팀 차석이란 것이다. 그래서 팀장이 부재중이면 보통 차장급들이 하는 대결을 하고 있다. 이를 봐도 회사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다. 부서별 직급 배정이 균등하지 않아서 고작 대리급에게 이런 막중한 업무를 맡기고 도전적으로 미래를 그리게 하니 말이다. 그래서 과장 역할하는 대리, 직급을 넘어선 직원이란 수식어가 따라붙곤 하지만 결론적으로 회사에선 다 아무 의미 없고 쓰잘 떼기 없는 소리다. 그런 말들이 오고 갈수록 내 얼굴은 화끈거리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부끄러움이 내 몫이 될 뿐이다. 무수한 말들이야 어찌 됐든 내 월급은 변함없고 아래 직원들은 치고 올라온다. 무조건 내편인 신랑의 말마따나 고과를 잘 받아야 하는 시기 회사가 통합되었고 조직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팀장이 매년 바뀌어서 날 챙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에 무게를 실어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내 입으로 그걸 다시 끄집어내기 조차 민망하다. 그걸 극복하고도 승진하는 사람들은 존재하니 말이다.       


그냥 조금 어이없고 약간 화가 나고 많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감정이 들쭉날쭉했다. 이 모든 감정 변화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나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하필 발표 날 오후에 나는 사무실에 없었다. 그날 저녁 소식을 전해 듣고 개인적으로 전화를 건 팀장이 나보다 더 흥분하고 회사 분위기를 전해주며 본인이 더 눈물이 날 것 같다고까지 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크게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다 말을 잇는 팀장은 내가 필요하다며 퇴사 생각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기분이 조금 풀리다가 자기 변호같은 말들에 지치기도 하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 퇴사해야 하나? 그래, 퇴사가 하고 싶기도 했다. 확 질러버려야 멋지니까.      

   

팀장한테 나는 쿨하지 못해 내일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침대에 드러누워 반나절을 보냈다. 주식 수익금을 보내주겠다는 신랑의 톡을 보고도 물욕에 초월한 듯 평상시와 다른 반응을 보이자 그때서야 무슨 일이 있음을 감지한 신랑이 승진 누락 소식에 회사 욕을 해댔다. 그런 회사 뭘 믿고 계속 다니냐며 퇴사하자고 난리였다. 그래, 그래서 당신도 나갔지. 이 꼴 저 꼴 보지 말고 나도 같이 나갔어야 하는데 내가 눈치없이 너무 오래 다녔다.(나는 정말이지 신랑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무표정한 딸의 눈치를 보던 엄마도 인생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어찌 됐든 당사자가 아닌 이상 주변에서 유난을 떨고 책에서나 읽을 법한 좋은 이야기를 해도 내 귀에는 들리지도 않고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반나절은 정말 퇴사할 사람처럼 계획을 짰다. 언제 만날 수 있냐는 지인들의 톡에 나 퇴사할 거니까 퇴사하면 실컷 만나자, 어쩌자 공치사도 하고 나 진짜 창피해서 못 다니겠다는 죽는소리에 그래, 이제 드디어 아이가 원하는 사교육을 다 시켜줄 기회가 왔다며 라이딩 계획을 알차게 짜보기도 하고, 이 김에 신랑이 있는 제주로 이주해서 살아볼까 학교 전학 절차도 알아보겠노라며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몇 가지의 플랜이 머릿속을 휘 집게 두었다. 그렇게 계속 다닐 이유보다 안 다닐 이유에 취해 딱 하루 심정 상해 있다가 느닷없이 신랑한테 결정을 통보했다. 더운 여름만 지나고 퇴사하겠다고. 20년 넘은 본사 건물에서 땀 삐질 흘리며 일하다 부서이동에 성공해 이제 막 에어컨 틀기 시작했는데 더운 여름, 밖에 덩그러니 나가서 뭘 할까? 믿기지 않겠지만 찌질함을 견디고 퇴사를 유보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더위 탈출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옷장을 가득 메운 옷들이었다. 월급 탔다고 보상받듯 옷 사고 생일이나 기념일로 신랑이 돈 줘도 옷 사고 수익금 나와도 주구장창 옷만 샀는데 저 옷들을 다 어쩌지, 대체 저걸 입고 어딜 간단 말인가, 사이즈 미스 나서 나중에 살 빼서 입겠다고 야무지게 쟁여놓고 아직 택도 안 뜯은 옷들도 수두룩한데 그만두더라도 이건 좀 입어보고 끝내야 할 것 아닌가 싶었다.계속해서 하반기 성과급으로 살 계획이었던 막스마라 코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퇴사하면 이렇게, 이렇게 될 거라는 온갖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뒤라 그런지 분노도 어느 정도 사그라들어 있었다.     

당연한 이유겠지만 가장 피부에 와닿는 건 금전적인 부분이었다. 대출압박이 만만치 않았다. 월 상환금이야 그렇게 크지 않으니 어찌 지내본단 생각에, 그래 그럼 까짓 거 집 팔고 그만둔다, 이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세금 안 내자고 10월까지 기다리면 벌써 하반기고 그럼 나는 내 일 어느 정도 마무리할 때쯤이고 곧 있으면 성과급 나올 테고 그렇게 몇 달 지나면 이미 화도 좀 풀릴 테고 너무 익숙히 다니고 있을 내가 뜬금 없어졌다. 그때 돼서 퇴사하면 더 별론데?      


회사에는 가지 않고 머릿속은 복잡한 상태로 사람을 만나고 시간을 쓰고 돈을 쓰고 내 감정을 입 밖으로 내면서 내 마음에 답은 예상치 못한 루트로 찾아왔다. 지인과 만나 소고기를 먹고 (돈이 좋지) 지인 별장에 초대받아 노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돈이 있어야 돼) 머리 염색에 20만 원이 넘는 비용을 지불하며 (돈 쓰는 게 제일 재밌어) 당장의 경제력을 놓을 수 없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나는 회사에 가지 않으면서 회사의 존재감을 느끼고 이제 다시는 돌아올 일 없을지도 모른다는 월급날의 중독성만 치명적으로 재확인했다. 그래서 나는 퇴사 대신 다이어트를 하기로 했다.     

 

갑자기 입맛이 없어진 건 신의 축복이었다. 뭘 먹어도 맛있고 맛있는 것 사 먹을 궁리만 하던 내가 회사에서 점심을 거르고 자리를 지켜도 별스럽지 않았다. 회사에 가는 이유가 점심먹는 일 정도로 밥에 진심인 내가 커피 한잔만으로 식사를 때울 수 있다니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김에 다이어트를 하면 땀도 덜 흘리고 옷도 핏이 살고 돈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퇴사를 유보케 한 현실적 이유 세 가지를 하나의 결과물로 승화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퇴사를 유보하고 이상한 논리로 접근하다보니 이게 생각보다 별일이 아닌 것임을 너무 빨리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의미부여만 하지 않고 흘러간다면 이미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코로나 시대에 아이 돌보러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회사를 다니는 게 어디냐까지는 갈 필요도 없다. 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승진을 못하고 연차가 꽉 찬 직원들은 아무도 건들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가만있으면 가만있어서 눈치를 보고 웃고 떠들면 저게 오늘은 괜찮은 건지 살핀다. 거기에 일을 미루지 않고 원래대로 묵묵히 할 몫을 하면 울트라 파워 초강력 존재가 되어 그냥 그 사람만의 고유한 영역이 생겨나는 것이다.


팀장이 이번 고과를 S를 준대도 내 마음은 안 풀린다. 내년에 승진이 보장된다고 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러 제도와 배려로 회사를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것과 공식적인 분장표 내 일만 허투루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라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달콤하다. 잔소리는커녕 회사에 나와 자리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아무도 권력이라 생각지 않는 이 만년 대리 자리를 스스로에게 선물로 주고자 한다. 다이어트도 성공 못해도 된다. 계속 예쁜 옷 사며 그저 누리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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