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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un 13. 2016

여기까지 끌고 온 너라는 바람

두 여자의 조금 특별한 우정


최근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드라마를 즐겨보고 있다. 매주 금요일 결혼한 아줌마 둘이서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기분 좋은 일정 맞추기를 시도한다. 오붓하게 장을 보고 간단히 국수 같은 걸로 요기를 하거나 집에서 후다닥 저녁을 만들어 먹는다. 더 이상 해야 할 일 없이 여유롭게 TV 앞에 앉아 열혈 시청자 모드가 되고 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엄청난 내공의 이 드라마를 제시간에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도 감사지만 이를 공유하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을 행운이라 여겨진다. 그런 행운 같은 '디어 마이 프렌드'가 내게 바람처럼 나타난 건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어느 초여름날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여자 동기보다 남자 동기들과 어울리는 게 편했던 나는 2학년이 되자 함께 다닐 친구가 없어 자연스럽게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 그 친구들을 하나둘씩 군대에 보내고 대부분의 교양수업마저 혼자 듣는 날이 많았지만 꽤나 꿋꿋한 시간이었다. 학점 관리는 관심도 없었고 학교에 꼬박이 나오는 것이 기특할 정도였다. 그렇게 희미한 시간들이 그저 나를 지나쳐 가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대화도, 특별히 친분이 쌓일 기회도 없던 한 학년 아래 여자 후배가 불쑥 나타나 자기 아르바이트하는 데를 구경시켜준다고 전산실에도 데리고 가고, 도서관 갈 거니까 같이 공부하러 가자고 하고, 자기 일하는 학원에 사람 필요하니까 가서 알바도 하자고 했다.


정신없이 훅 들어오는 관계에 나는 거부감이 아닌 묘한 재미를 느끼며 이상하리만큼 군말도 없이 후배를 잘 따라다녔다. 실제로는 후배의 리드에 기대고 있었지만 친해지고도 2년을 꼬박 존댓말을 쓰는 후배 때문에 군기 잡는 선배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던, 지금 생각하면 참 어렸지만 한참 어른 같기만 하던 그런 시간이었다.


나중 말로는 혼자 있는 게 불쌍해서 챙겼다고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 불쌍한 선배가 후배의 주변 사람들에게 기특하게 여겨진 건 반전이랄 것도 없는 반전이었다. 복사 자리로 들어간 학원 알바에서 어떤 이쁜 점을 발견하셨는지 수업을 해줬으면 하시는 후배의 은사님이자 원장님의 인정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 주었다. 수업시연을 위해 준비를 하고 나를 내보이는 과정을 통해 나는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학원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후배는 예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해 온 어학연수에 같이 가자고 갑작스러운 제안을 해왔다. 나랑 같이 가면 부모님이 안심하실 거 같다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했지만 그런 솔직한 모습이 오히려 맘에 들고 쉽게 얻을 수 없는 기회를 별 거 아닌 것처럼 내어주는 것이 참으로 쿨하다고 느껴졌다.


특히나 그 연수는 원장님의 가족분과 연계된 자리라 굉장히 조심스럽고 누가 봐도 내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원장님도 후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셨고 집에서의 허락도 별 탈 없이 원만하게 구할 수 있었다.


짧지만 인생에서 더없을 강렬한 기억들을 안고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각자 졸업을 하고 각자의 자리를 만들어갔다. 나는 전공을 살리지 않을 계획이었기에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며 시간을 보내며 애들도 계속 가르쳐보고 준비했던 시험에서 낙방도 해보고 어쩌다 들어간 곳에서 있는 고생 없는 고생으로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맛보고 있었다.


그런 사이 교수 추천으로 알차게 취직한 동생은 몇 년이 지나 자리가 잡히자 언니가 해줄 일이 있다며 나를 불렀다. 망설여지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이제 막 커가는 회사의 새로 만들어지는 자리에 추천받았다는 건 꽤 멋지고 또 한 번의 괜찮은 제안으로 여겨졌다. 학교에서 코 앞 거리에 살면서도 1교시 수업에 시간을 못 맞춰 택시를 잡아 타고 교정 안까지 들어가던 내가 오전 5시 50분 광역버스를 타고 출근을 시작했다.


토익 점수가 더 높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나를 자극해서 퇴근 후 학원을 다니게 한 것도 동생이었다. 바로 써먹진 못했어도 그 점수대를 받아본 것과 받아보지 못한 건 분명 큰 차이가 있었다. 일터에서도 성취감이며 인정이며 내 인생에서 온전히 나에 대한 평가가 최고점에 이르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꼬박이 4년을 채울 무렵 먼저 회사를 옮겨 컨설턴트가 된 동생은 언니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며 다시 한 번 나를 꼬드겼고 나는 다시 한 번 그 바람에 응했다.  


동생은 스무 살 이후 성인이 되어 지금까지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던 사람이다. 나를 자극해서 공부하게 하고 돈을 벌게 한 것보다 사실 어쩌면 내 감정과 감성을 나눈 것이 우리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서로의 이별의 자리에서 묵묵히 들어주고 함께 울어준 것도, 잘 풀리지 않는 상대를 욕해주고 격려해준 것도, 영화를 보고 난 뒤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던 것도, 서로에게 책이나 노래를 추천해준 것도, 여행에서 젊은 날의 기억될 만한 사진을 찍어준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직장 동료를 함께 험담해주고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던 공감을 내어준 것도 서로였다.  


그렇다고 그 시간 동안을 꼬박 둘이서만 붙어 다닌 것도 아니었다. 둘이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각자의 시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고, 연애도 곧잘 했으며, 또다시 필요하면 언제든지 달려가 줄 수 있는 그런 사이라 더할 나위가 없었다.


자기도 설명할 수 없는 자기감정을 언니의 말로 들으면 무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동생을 보며 참 신기한 아이구나 싶었다. 이런 능력은 돈벌이와는 하등 관계가 없었고 나는 그게 특별한 줄 몰랐다. 보통의 잣대로 보면 무능해 보일 수 있는 나의 성향을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강점이라고 말해주는 것들 때문에 나는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었고 덕분에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동생은 그 자리에 필요한 능력을 언니가 갖추고 있었고 누구보다 잘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뿐이라고 별거 아니란 듯 말하지만 그걸 알아보고 나를 설득할 수 있는 것 또한 그 사람의 능력이고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신호였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생에는 길목길목마다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고마움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보통의 관계로는 잘 표현하기 힘들 만큼 동생과의 사이가 각별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막내인 내게 동생이 되어주고 장녀인 동생에게 언니가 되었던 우리의 우정은 십 년이 넘어서 이제 편안함과 안정감 밖에 남지 않았을 줄 알았던 시기에 위기를 맞이했다.  


정말이지 보란 듯이 예상을 깨고 어긋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원인이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그 시기 나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내가 다른 관계를 맺고 지금과 달라질 우리 모습을 동생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가장 많은 축하를 해 줄 거라 믿었던 사람이 갑자기 과거에 사로 잡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서운함을 넘어서 공포에 가까웠다.


언제나 독립적이고 앞만 보고 달리던 그 동생은 그 순간만은 그 자리에 없었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아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돌이켜보니 모든 게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항상 남의 손에 이끌려서야 겨우 무언가를 시도하던 나는 처음으로 큰 공유 없이 연애를 한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을 했고 결혼이라는 큰 문턱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서고 있었다. 내 인생의 굵직한 이벤트를 만들어준 동생을 나도 모르는 사이 배제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끔 삐끗거리고 싸우긴 해도 언제나 그렇듯 제자리를 찾을 거야, 우리는 잘 해낼 거야, 믿음이 있었지만 힘이 든 건 사실이었다. 내가 늘 주문처럼 읊조리던 '시간의 힘'이란 말이 어쩐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듯했다. 그 시기 우린 더 이상 이십 대일 수 없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마주하고, 지난날의 추억에서 마냥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게 결혼이라는 계기로 표출된 것뿐, 우리는 서로에게 다시 귀를 기울였고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화해를 했다.


이듬해 동생도 오래 만나던 분과 결혼을 했고 우린 둘 다 아줌마가 되었다. 그렇게 우린 그 시간마저도 넘어서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우정을 간직한 채 이렇게 드라마를 보려고 앉아 있다. 게다가 나에게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은 나란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끔 이해 못할 내 성질머리의 끝을 유일하게 '공감'하는 사이로 자리 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살아있는 앨범이 되어주었고 이 사실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이유가 되어 버렸다. 시간 나면 들춰보고 여유 생기면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사이, 한마디를 꺼내면 나는 기억 못하는 내 얘기들과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 대한 말들이 쏟아져 각자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 참 많이도 쌓이고 쌓였다.   


지난주 시장 골목을 타박타박 걸으며 드라마 얘기, 글 쓰는 얘기를 하다 문득 잔잔한 고백을 하고 말았다. "너 안 만났으면 나 이렇게 못 살았어." 또 한 번 별스럽지 않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이 그녀답다. "됐어. 어떻게든 잘 살았을 거야." 더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아니란 걸 나는 안다. 지나친 과장처럼 들릴지라도 너라는 바람이 나를 밀고 밀어 적당한 곳에 안착시킨 거라고, 그래서 나는 싹을 틔워 내 젊은 날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고 그렇게 꼭 한 번은 고백하고 싶었는데 말하고 나니, 싱겁다.


고맙다. 나타나 줘서.  


관련글. 매거진 [나를 만들고 채우는 것들] 내 동생의 연수 https://brunch.co.kr/@newdream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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