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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ul 19. 2016

내 동생의 연수

그래도 언니긴 한가보다


나를 이끌어준 바람 같은 동생이 연수를 떠났다. 여기까지 이끌어 주었다고 붕 띄워 놓았지만 언제까지 동생은 동생이었다. 그녀의 언니인 내가 재작년, 그녀의 형부이자 남편 되는 사람이 작년, 올해는 드디어 그녀 차례. 어쩌다 보니 세 명 모두가 포상으로 유럽연수를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에 나름의 공감대로 끈끈이 엮이게 되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언제 가는 건지, 진짜 가기는 하는 건지 조차 불확실하던 연수 일정이 기습으로 정해지고 바쁜 업무로 제대로 준비도 못하던 동생은 갑작스레 떠나기 전날 나와 남편을 번갈아 찾았다. 1차적으로 잠도 깨기 전 아침, 문자 알림이 있. 비행기에서 읽을 책 두권 부탁기에 출근 준비를 하며 내가 한 권, 남편이 한 권을 골라 챙겨 두었다.


2차는 이동시 들을 추천 음악 요청이었다. 이건 평상시 음악을 좋아하는 남편 몫으로 선별된 트랙은 메일로 전송되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나를 데리고 다니기. 환전을 하고 렌즈를 사고 단순한 처리사항에 특별히 해 줄 역할은 없었지만 그냥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게 느껴져 별 말하지 않았다. 어린애 같이 의지하는 모습이 어쩐지 마냥 이뻐 보였다고나 할까.


마지막 짐싸 았다. 점심, 저녁 다 사주며 대놓고 부탁을 하니 나는 마구 부려먹으라면서 보기 좋게 응해주기로 했다. 우선 필요한 물건을 한 군데로 다 모으자고 했다. 낮에 잠깐 이동시에 필요하다고 들은 것과 일반적으로 여행 시 필요한 물건을 생각해 즉시 기본리스트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으로 두세 개 리스트를 추가로 비교해 체크한 뒤 필요한지 여부와 가져갈지 여부를 묻고 범위를 좁혔다.


직접 쓸 사람이 물건을 가지러 방과 거실을 드나드는 사이 나는 연수 일정표와 계획안을 한 번 쭉 읽어보고 정신없는 동생에게 말로 읊어주고 어떤 식으로 연수가 진행될지를 함께 공유했다. 일차마다 입어야 할 옷을 정할 때도 기업 방문과 이동이 있는 것에 주의해서 세미 정장으로 할지 캐주얼로 할지를 정하고 치마를 입는 게 좋을지 바지가 나을지도 의논했다. 그렇게 정해진 옷은 구겨지지 않게 돌돌 말아 정장과 캐주얼을 구분하고 나머지 짐들도 쓰임에 맞게 구분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아침에 신을 신발과 싸갈 신발을 물어 패킹을 마무리하고 캐리어 위에 다음 날 입을 옷을 말끔하게 올려놓았다. 체크리스트에는 있지만 미쳐 준비가 안된 물건과 아침에 다시 챙겨야 하는 것은 따로 체크해뒀던 것을 한데 모아 메모지에 표시한 뒤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뒀다.  


"아침에 이것만 체크하고 나가면 돼. 물티슈랑 밴드는 공항 가서 꼭 구입하고."


생각보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 모습을 지켜보던 동생이 던진 한마디 의외였다. "언니 진가가 여기서 나오는구나." 너무 당연하고 별거 아닌 일에서 무려 진가라는 말을 해주니 오히려 내가 민망하다고나 할까. 밥값이나 제대로 한 건지 모르겠다며 집까지 또 차를 얻어 타고 돌아왔다. 그 길이 참 길고 아련했다.  


지금은 언니 같아진 동생은 가끔 이렇게 나에게 어리광을 부려 그래도 아직은 언니의 자리를 실감하게 한다. 머리 묶어달라고, 새로 생긴 자기 방을 함께 꾸미자고 조르던 예전의 그녀가 많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카톡이 왔다. 스위스 수도 베른을 걷고 있다고. 영상통화를 하자길래 먼일인가 했더니 화면을 돌려 거리를 보여줬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요동쳤다. 최근 들어 함께 여행도 못했고 글을 쓰다 보니 오히려 추억을 쌓는 일에 더 소중함을 느끼게 되어 조만간 여행을 하자고 했었는데 같이 가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함께 있는 느낌을 주니 마치 내가 보내준 여행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수의 시작을 함께해서인지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늘 동선을 공유해주고 해줄 말이 많다며 한 마디씩 안부를 잊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만나자고 벼르기만 한 채 결국 우린 일주일이 훌쩍 넘어 입국한 지 열흘이 지나서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고도 대단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꼭 내게 해야 했던 '할 말'들은 들어보니 카톡으로 대강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텍스트만 봐도 다 상상할 수 있었단 말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그저 무슨 내용으로라도 내 앞에서 떠들어주는 존재가 고맙기에 나는 또 한 번 별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연수는 무사히 지나갔고 우린 다시 한 번 서로의 존재를 실감할 뿐이었다.


관련글. 매거진 [나를 만들고 채우는 것들] 여기까지 끌고 온 너라는 바람 https://brunch.co.kr/@newdream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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