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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un 21. 2016

옷을 정리하며 나를 떠나보냅니다

나이 듦에 대하여


옷을 몇 벌 구입했다. 회사에 입고 갈만한 '늘 입을 수 있는 옷'도 중요하지만 '단지 입고 싶은 옷'도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최근엔 그런 소비를 전혀 못했다. 그래서 평상시와 달리 실용성을 따지지 않고 외형적으로 맘에 들고 내가 예뻐 보이는 옷을 크게 재지 않고 구입했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엄마가 되고 나니 이토록 당연한 사실과 작은 기쁨이 이렇게 글을 쓸 이유가 될 만큼 나에게는 큰 사치가 되어버렸다.


아이를 안아주고 입을 닦아주고 또 자주 주변정리를 하고 옷을 넣어주는 등 살뜰이 챙기려다 보면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그러니 바지를 입고 있으면 늘 무릎 부분을 추키며 앉거나 펄럭이는 옷 때문에 나도 모르게 가슴 섶을 여며야 했다. 바지 무릎 나오는 게 싫어 조심히 앉는 게 습관이던 나는 이젠 매번 그럴 수가 없어 차라리 헐렁한 옷을 입거나 구김이 잘 가지 않는 재질의 옷을 선택하게 되었다.


옷을 고르는 기준이 바뀌니 '미시'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인 듯했다. 옆구리, 겨드랑이 조이지 않고 활동성이 편하면서 젊은이들의 옷을 흉내 낸 듯한 옷, 레깅스를 입어 짧은 길이의 옷을 보완하고 레이어드를 통해 군살을 보이지 않게 해주는 그런 옷들. '미시옷'이란 참으로 정교한 틈새시장이 아닐 수 없어 '미시옷'이라고 규정짓지 않아도 어느새 나는 딱 미시의 모습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런 옷들로는 채울 수 없었던 허한 마음이 고작 '입고 싶은 옷' 하나로 달래지는 것을 보면 나는 이런 옷들이 조금 싫었던 것 같다. 화려하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던 내가 타협점을 거쳐 옷을 구입하고 한 번을 돋보이고 더 이상 활용하지 못한다 해도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던 적도 있던 나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의 나는 옷을 무척 좋아했고 많이도 구입했었다. 비싼 옷은 아니더라도 그때 유행하는 아이템을 놓은 적이 없었고 옷을 어디서 구입하는지 여러 번 질문받는 것도 익숙했었다. 헤어 길이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어울리는 스타일을 만들어가며 입는 재미를 즐겼다. 옷을 사면 살수록 점점 매력에 빠져 평생 옷 장사를 하며 입고 싶은 옷을 실컷 입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해봤다.


6년 전 쇼핑몰을 운영했던 친구를 위해 잠시 피팅을 해 준 적이 있다.

옷이란 나 자신을 대변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취미거리 없는 나에게 소소한 재미이자 기쁨이 되어 주었다. 여행을 가거나 조금 특별한 날이면 의상을 준비하며 그 날을 고대했다. 그래서 집에 걸어둔 옷만 봐도 특별한 날의 기억이 떠오르고 그 날의 나를 생각하면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여름이 오고 겨울이 되면 철 바뀜을 맞이하는 건 제일 먼저 옷 정리를 하면서였다. 입을 옷을 꺼내고 철 지난 옷을 장에 넣는 일, 그리고 지난해엔 이런 옷을 입었었구나 잠시 감상에 젖어들며 한바탕 다림질을 하고 나면 한동안 마음 뿌듯하게, 그리고 든든하게 계절을 날 수 있었다.


옷을 많이 사 입다 보니 어울리지 않는 옷에 큰돈을 쓴 적도 있었고 생각지 못한 아이템이 나를 돋보이게 해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젠 나에게 좀 더 어울리는 스타일 그리고 잘 어울리지 않는 옷감까지도 대강은 알게 되어 한 번 구입에 좀 더 까다로워졌다.


한 가지 옷은 최소 2주간의 텀을 두고 입으라던 어느 책에선가 본 '옷에 대한 소신'에 절대적으로 공감하던 때도 있었다. 진정 스타일리시한 직장인의 자세 아니겠냐던 그 공감을 지금은 절대 할 수가 없다. 그만큼의 옷도 없지만 사실 다양한 옷을 소화할 만큼의 체력과 마음의 여유도 이젠 없기 때문이다.


또,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긴축모드에 돌입한 탓도 있고 정말 사고 싶은 옷을 쉽게 만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맘에 드는 건 전에 입던 스타일의 반복이고 또 어떤 건 몇 번 못 입고 그냥 걸어 놓을 게 뻔히 보이고 시행착오를 겪은 탓에 나를 알고 실패를 줄일 수 있었지만 그만큼 양보도 없었다.


시행착오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내 장롱에 남아 다. 이사를 하면서 많이 버리기도 했는데 어쩌다 둘러보니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는 옷이 태반이었다. 언젠가는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발랄한 원피스, 집에서라도 대강 활용하면 될 것 같은 낡은 티셔츠. 옷의 활용도도 미련이지만 이 옷을 버린다면 내 젊은 날을 전부 놓쳐버릴 것 같은 아쉬움에 붙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이즈도 맞지 않는 옷들을 부여잡고 언젠가 살을 빼고 입겠다는 스스로를 이제 말려야 할 때가 왔다. 그때 내가 저렴한 옷을 입고도 한껏 멋을 부릴 수 있었던 건 그 젊음이 주는 특권을 누렸던 것뿐이었고 조금만 각 잡으면 확 예뻐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던 20대와는 나는 확연히 달라졌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풀 착장에 다가섰을 때 비로소 조금 봐줄만한 지금은 조금만 노력을 게을리하면 늘어지는 건 순간이고 풀어지면 다시 여미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렸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내려놓아야만 한다. 삼십 대 후반의 나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상실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활용 수거함으로 보낼 옷들을 하나둘씩 꺼냈다. 언젠가 입을 것이라며 기약 없는 약속을 하는 대신 나는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며 좋았노라고 그리고 고마웠노라고 옷들과 나만의 작별 의식을 치렀다.  


옷 하나를 사도 좀 더 튼튼하고 덜 질리고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은 옷을 고르는 지금의 내가 싫을 때도 있지만 그만큼 나는 노련해졌고 심플함의 미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지금의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삼십의 후반을 보내고 중년의 문턱을 잘 넘어서야 십 년 뒤 이십 년 뒤에도 그때에 맞게 제대로 나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 오프숄더 블라우스, 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이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다만, 나는 실속 있는 소비만을 위해 옷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벌의 옷을 구입하며 활용과 값어치에 대한 절대적인 패턴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어 좋았던 기쁨을 '보류'와 '주저'로만 두고 싶지 않다. 금방 유행이 지나고 입지 못할 옷이라도 한두 번은 입고 지나가야겠다. 내가 살아갈 앞으로의 날 중 나는 지금이 가장 젊기에 내 젊음을 즐길 것이다. 그래서 아직 입지 않고 모셔둔 새하얀 오프숄더 블라우스를 생각하면 마음이 콩콩 설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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