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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un 08. 2016

더 이상 기대되지 않는 약속

엄마 나는 잘 크고 있어요


엄마가 되려면 그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 상관없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가 찾아온다. 진료비, 보육료 등 정부 보조금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특정 카드를 만들어야 하고, 육아휴직급여를 지급받기 위해서는 서류도 잘 작성해야 하고, 정해진 일정에 따라 예방접종을 맞추고, 일 년에 한 번 영유아 검진이란 것을 받아야 한다.


대개는 제멋대로이고 싶어 하지만 때에 따라 규칙과 규율에 얽매이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는 나는 이런 일련의 절차와 상황들에 굉장히 착실한 태도로 임했다.


특히나 예방접종은 계속 기억하고 있다가 챙겨야 하는 일이어서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지만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알림을 주기도 하지만 나는 달력에 표시해놔야 맘이 편하다.) 예방접종 폐해에 대한 무시무시한 글을 읽은 것 치고는 정말 고분고분한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히는 시간은 몇 분이 채 되지도 않는데 이동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짐까지 싸들고 집을 나서자면 신생아 시기엔 운전해주는 사람, 아기를 안아줄 사람까지 대동하고 3인 1조로 움직이기도 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아기를 한 명의 국민으로 받아들이고 관리하는 가장 첫 번째 관문이 영유아 검진이 아닐까 싶다. 영유아 검진이란 쉽게 말해 아이가 잘 먹고 잘 크고 있는지, 부모는 아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 검진이 너무 기다려지고 기대되었다. 우리 아이는 잘 크고 있는 걸까? 어디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관리 대상에 속해있다는 걸 깨달은 것 외에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가 없다.


올 가을이면 다시 검진을 할 시기가 돌아온다. 지금까지 총 3번의 영유아 검진을 받았고 그 간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솔직히 다시 받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제 내 아이에 대해 알만큼 알기도 하지만 얻고자 기대했던 전문의 소견을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1차 예약을 하던 때, 문답지에 답을 적어내며 아이를 더 살필 수 있고 나를 엄마로서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정된 검진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고 다른 사람에게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소견과 키랑 몸무게가 상위 몇 프로라는 말을 전해 듣는 것이 전부인 건 왠지 모를 아쉬움을 남겼다.


2차 문답지에는 어휘에 대해 묻고 있어 아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적어 갔는데 감탄사는 단어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는 잠시 위축이 되었다. 말이 느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할 줄 아는 말이 없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두세 마디 가지고도 좋다는 거 하고 싶다는 거 의사표현도 하는데 정말 문제가 있는 건지 싶었다.


내 말을 곧잘 알아듣고 두 가지 이상 이어지는 행동도 제법 했는데 그런 것에 대한 의논 같은 건 애시당초 할 수가 없었다. 퉁명스럽진 않았지만 더 이상 해줄 말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내가 체크한 번호대로 컴퓨터에 입력하고 그 데이터 값을 근거로 출력된 그래프와 퍼센티지로 이루어진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돌아올 뿐이었다.


이게 뭐지? 이걸로 뭘 알 수 있지? 지금까지는 예방접종을 맞추던 병원이 가깝다는 이유로 그리고 우리 아이를 한 번이라도 더 진료했다는 이유로 찾아갔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공식일정 치고는 너무 시시했다.


우연한 기회로 외부에서 출장 온 전담 의사가 꽤 괜찮은 상담을 해준다는 병원을 알게 되었다. 매월 초 한 달치 예약을 모두 받는데 토요일은 매번 꽉 차 있었고 그나마 평일도 몇 타임 남아있지 않았다. 세 번 연락 끝에 한 시간 조퇴를 하기로 하고 그 병원을 예약해 찾아갔다.  


3차 문답지에는 언어능력이 강화되고 사회성이 추가되어 있었다. 문답지대로라면 아이는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잘 크고 있었다. 엄마의 주관적인 의견이 아닌 객관적인 질의에 응답한 결과였기 때문에 아이의 전반적인 발달에 대해 듣고,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고 키우고 있는지 대화를 하다 보면 앞으로 육아 방향에 도움이 될 것이라 또 한 번 기대감에 부풀었다.


결론적으로 한 시간 반 가까이 이어진 상담에서 나는 내내 혼만 나다가 씁쓸하게 돌아왔다. 마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밤길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차 안에서 울어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아이를 두고 그럴 수가 없어 참았다.


예약된 시간대가 늦은 탓에 병원은 한산했고 아이에게 병원 가서 주사도 맞지 않아도 되고 네가 얼마나 잘 자라고 있는지 상담만 받고 올 거라고 알려줬는데 예정에 없던 빈혈검사를 받게 되면서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병원 TV에서 나오는 '로보카 폴리'를 보며 이제 막 안정을 찾고 있는데 상담 선생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하나의 독립된 공간이 아니어서 상담실 인지도 몰랐는데 나는 어리둥절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 인사를 했다. 아이에게도 분명 새로운 환경이었을 테고 앞서 눈길을 주었던 폴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차여서 조금 시간을 끌게 되었는데 엄마에게 호출되어 무릎에 올라와 앉는 짧은 과정을 -생각지 못한 사이 - 온전히 평가받아야만 했다.


엄마가 아이를 너무 아기처럼 대하고 있다는 것이 첫 평가였다. 얼마 전 그런 고민을 했었다. 아이를 너무 큰 애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래서 조금 의도된 행동이 과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30개월이면 아직 아기가 아닌가요?"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9개월 이후부터 3개월의 연습 끝에 돌부터는 자립할 수 있도록 훈육해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부르는 말에 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회피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어린이집에 오래 다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고 할 수 있었다면 더 늦게 보내고 싶었던 마음을 알기는 하시는지 반문하고 싶은 걸 참았다. 이론적으로 굉장히 이상에 가까운 육아법 제시에 일부 수긍을 하면서도 최대한 알고 있는 걸 잘 지키고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정 부분 부정을 받은 것 같아 힘이 빠졌다.


사실 모든 의견을 수용 할 필요도 모든 의견을 반대할 필요는 없다. 공감하는 부분은 확신을 얻고, 아닌 부분은 왜 그런 건지 잠시 동안의 고민과 함께 어느 정도 선에서 조정이 있으면 충분하다.


하지만 생각이 많아지고 복잡해졌다. 내가 정말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괜한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묻고 또 물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의하고 객관적인 점검을 받을 필요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당분간은 이런 시간을 갖고 싶지 않다는 피로도 느꼈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내가 아이를 너무 애처럼 대한대. 무슨 사이트에서 키즈 영상 보여주라 하고, 축구는 가르치라는데? 라며 간단히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특별히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신경 쓰지 마." 아이의 어리광을 조금은 더 받아주자고 했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말이 없어도 하소연할 데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주사 맞지 않고 아프게 할 일도 없겠다고 설명해줬는데 이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아이에게 사과했다. 아이는 문제가 없다. 머릿속에서 점점 느슨해지던 기준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점검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솔직히 어떤 경험을 하고 있건, 아무리 패스하고 싶다한들 예방접종, 영유아 검진 이 두 가지는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가 없다. 어린이집에 보내려면 증명서와 확인서로서 반드시 제출되어야만 하는 서류이기 때문이다. 기대를 접을지 아니면 좀 더 나은 장소를 찾아볼지 더 이상 기대되지 않는 약속이라도 남은 기간 고민이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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