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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ul 02. 2016

시절에 대한 최선의 향유

보이후드(2014) 2015년 3월 기록


사전정보 없이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전문가 평점이 아주 후하단 사실만 기사를 통해 얼핏 본 기억이 있을 뿐 이 영화를 보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정말 우연한 기회였기에 기대 없이 시작한 영화였으며, 오히려 사전정보도 방해도 없어 더더욱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영화의 가장 큰 장치라 할 수 있는 하나는 무려 12년 간 촬영했단 사실이다.(포스터에도 나와있다) 이를 몰랐던 나는 장면이 바뀌는 특정 시기마다 아이가 성장해서 나타나자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닮은 아이를 캐스팅 한 건가? CG없이 배우가 실제로 자라는 모습을 한 영화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이가 자라 새로워진 모습으로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는 착각이 들고 그 착각은 나를 더 몰입하게 했다.     

주인공 메이슨 역을 맡은 엘라 콜트레인은 느릿느릿하고 차분한 말투가 상당히 매력적이고, 사춘기를 지나는 소년 특유의 어둑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비포선라이즈의 제시, 에단 호크의 출연이 반갑고 좋았다. 그는 여전히 지적이며 설득력 있는 대화에 능숙했다.


아빠로서 딸, 아들과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었는데, 부부싸움을 보며 불안해하는 아이들에게 너희도 서로 싸우듯 부모가 싸우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말이 참으로 당당해 보였다. “싸웠다고 해서 동생으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 않니?”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다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명 유익하지 않은 일일 테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급급하기 보다는 현 상황을 설명해주고 이해시키는 과정도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긴 시간 천천히 인생을 다룬 영화이기에 몇 가지 소소한 에피소드와 대화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말수가 적어지는 딸에게 생물학적 아빠로서 뻔 한 대화는 하지말자, 이건 가족의 대화가 아니다, 라고 말하던 직설적인 충고는 아직도 생생하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타인의 삶을 바꾼다는 것은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이를 표현한 식당 매니저 에피소드도 참으로 잘 녹아든 장치라 여겨진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아들이 대학 진학을 위해 떠나는 모습을 보며 ‘이 뒤에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는 메이슨 엄마의 울음 섞인 넋두리는 마치 내가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가슴이 찡했다. 직업의식에 대한 메이슨과 교사와의 대화는 어른의 충고다웠고, 파티에서 이성친구와 나눈 인생에 대한 고민은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을 정도로 너무 훌륭한 대화 장면이었다.   

 

특징적인 것은 '롱테이크'의 비중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인데 그래서 대사의 일부가 애드리브가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궁금증에 관련 글들을 찾아보니 감독은 인터뷰에서 애드리브란 전혀 있을 수 없고, 치밀한 대본과 리허설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고 한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영화 중간부분에 에단 호크가 직접 불러 준 노래가 있는데 이것도 자작곡이란 사실을 알고 굉장히 흐뭇했다. 비틀즈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느껴진 만큼 아들에게 아끼는 노래들을 CD로 구워주는 장면이 다시 한 번 오버랩 되면서 주인공 역할에 걸맞은 배우를 섭외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승전결 없이 메이슨의 인생에 대해 잔잔하게 풀어 그냥 물 흐르듯 흐르는 이야기에 누군가는 지루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메이슨의 유년기 12년을 같이 봤다는 사실에 살짝 동지애 같은 것이 느껴진다. 시끌벅적 인생이 소란스러워 조용함을 원하거나 자극적이고 반전이 대단한 요즘 영화들에 지쳤다면 한번쯤 보이후드처럼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 같은 영화도 봐주면 좋지 않을까 싶다.  

      

P.S. 엘라 콜트레인은 영화를 찍는 동안 편집본을 전혀 접하지 못한 채 기자들과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영화를 보게 되었고 감정이 복받친 나머지 많이 울었다고 한다. 비록 영화였지만 '엘라 콜트레인의 보이후드'는 '영화 보이후드'와 함께였을 테니 그 심정이 백만 번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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