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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라 Sep 03. 2023

할 일, 외면, 그리고 직시

미루는 자의 인생은 늘 잔잔하게 불행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열변을 토하며 시간의 흐름을 알렸다. 이내 네 번째 알람이 울렸다. 다정한 피아노 선율이 '이젠 제발 일어나, 그래줄 수 있지?'라며 간청하는 듯했다.


    나는 알람을 끄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눈앞에 가져다 댔다. 안경을 벗은 채로 시력판 가장 위 글자도 읽지 못하는 조차 이 정도 거리에서는 정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전날의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자판을 눌러 적었을 나름의 계획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졌다.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독서와 글쓰기. 9시부터 10시까지 녹화 강의 수강. 10시부터는...'


    더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때는 이미 오전 9시 반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고 나는 아직도 누워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3시간 분량의 미뤄진 계획을 책임져야 했다. 나는 10시에 울리는 알람을 하나 더 설정한 후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할 일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우울이 몸을 파고들어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마침내 제가 내 몸의 주인인 양 똬리를 틀고 의기양양하게 자리 잡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내 안의 많은 것이 나를 내치고 우울의 편으로 돌아선다. 열정은 의심을 품고, 희망은 비관이 되며, 모든 슬기로움 사이사이 안개가 들어찬다. 그러면 이내 두려움이 엄습한다. 나 혼자서는 싸울 수 없다는 생각에 손에 든 의욕의 검을 팽개치고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명백한 항복의 표시다.


    그러면 눈앞의 배신자들이 낄낄대며 내게 돌아온다. 나를 휘감고 기어 올라 캄캄한 어둠 속에 가둔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수 없게 된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일마저 막연한 공포로 돌변한다. 그렇게 오늘 아침을 반복한다. 알람을 끄고, 현실을 외면하고, 이불속으로 도망친다.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내 주위를 맴돈다. '왜 나를 무시해?'라며 간간이 나를 찔러보는 것들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잔뜩 겁을 먹어 몸서리친다. 모든 것이 무섭게만 느껴진다. 나를 행동하게 하는 모든 것이 말이다.



    병적인 우울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할 일이 있다는 사실에 벌벌 떠는 모순을. 그럼 할 일을 하면 된다고?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남들이 보면 게으르고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보일 뿐이겠지만, 사실 우리는 나와의 싸움에 임하고 패배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항복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우울 앞에서는 도무지 싸울 엄두가 나지 않으니.


    미뤄낸 할 일은 쌓이고 쌓여 몸집이 불어난 채 내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면 나는 더 두려워진다. 아까의 작은 적조차 이기지 못했는데 이렇게 큰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또 도망친다. 끝없는 싸움이지만 결과는 명백하다. 나는 패배한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난다. 많은 것들을 내일로 미뤄내며 애써 피해낸 하루가.



    철학자 세네카는 <도덕 서한>에 미루는 자에 대한 충고를 남겼다. 아직 마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용기를 갖고 즉시 뛰어드는 것이 미덕이라고. 그의 말이 내게 와닿은 이유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말인즉슨 누구나 해야 할 일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니까.


    세네카의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내 안에는 퍼뜩 두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안도였다. 내가 매일 느끼는 부담과 죄책감이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다행감. 모든 사람이 나와 같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잠깐의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얄팍한 안정은 이내 수치심으로 변모했다. 모두가 각자의 두려움과 싸워 현실을 이겨내고 있는데 나 혼자 한심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는 꼴이라니.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돌연 나를 앞질러 달려가며 조소를 띄우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할 일을 외면하는 것은 우울증의 모든 증상 중 가장 크게 내 일상을 망쳐 놓았다. 미루는 습관 탓에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동시에 내가 가진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힘든 일을 먼저 하라>의 저자 스콧 앨런이 말했듯 미루는 자의 인생은 늘 잔잔하게 불행했다. 주어진 일을 외면해 손에 넣은 자유는 자유가 아니었다. 할 일을 미룬 대가로 얻어낸 시간 내내 '그 일 해야 하는데 어떡하지'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더럽혔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내일은 해야지. 내일은 해야지. 내일은, 내일은, 내일은... 내일의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갈수록 막중해졌고, 급기야 나는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 일을 제때 하지 않은 대가 치고는 너무 컸다. 두려움에 맞서고 싶지 않았을 뿐 인생을 포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는 이겨내야 했다. 내가 피해온 것들이 내 삶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전에.

    나는 내게 행동을 촉구했던 책들을 펼쳤다. 그리고 메시지를 곱씹었다. 미루지 마라, 지금 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싸움에 임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알아야 한다. 나는 내가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휴대폰 어플에 표시해 둔 일정을 달력에 옮겨 적고, 학교 과제의 마감일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부재중 전화의 목록과 밀린 문자 메시지도 확인했다. 이곳저곳에 그림자처럼 널브러진 '할 일'의 형체들을 주무르고 정돈해 바로 세우는 과정이었다.


    한참을 정리한 끝에 내가 함락해야 할 적의 형태가 갖춰졌다. 눈이 마주칠세라 한참을 곁눈질로 훑었던 상대가 드디어 내 앞에 선 것이다.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혔던 미지의 공포를 직시한다면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나 나를 소스라치게 한 것은 상상과 현실의 크나큰 괴리였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나를 집어삼킬 듯 일렁이던 맹수였는데, 정작 내 앞에 있는 것은 잘 쳐줘야 한주먹거리인 아기 초식동물 정도였다. 실체를 알고 나니 차마 두려워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숨을 내뱉었다. 허탈함과 안도감이 뒤섞여 빚어진 무언가가 싸움의 끝을 알리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나는 할 일과 함께 찾아오는 두려움에 대처할 무기를 손에 넣었다. 나를 압도하는 무언가가 나를 겁주려고 할 때면 나는 눈동자가 아닌 몸을 돌려 그것을 마주한다. 두려움을 꾹 참고 벌벌 떨며 바로 본 곳에는 늘 생각보다 별 것 아닌 일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해야 할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내 마음속 잡음이었던 것이다.


    상대를 확인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쉽다.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면 된다. 가끔은 이렇게 쉬운 것을 지금까지 왜 못 했을까 싶어 과거의 나를 놀리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겪었던 그 순간의 두려움만큼은 실체가 있는 것이었음을. 그때의 나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현실을 마주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처절한 그 심정을.


    그렇기에 말해 주고 싶다. 가혹할지라도 일단 그 두려움을 마주할 것을. 우리는 자신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조차 없을 만큼 나약하다. 그러니 한 번, 딱 한 번 고개를 돌릴 용기만 있으면 된다. 무엇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 오늘도 이불속을 벗어나기를 짐짓 주저하는 내게 나지막이 속삭여 본다. 무엇도 나를 해칠 수 없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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