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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Jan 16. 2022

연애일기 3.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인생의 타이밍에 대하여


연애일기 3.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이제껏 우리는 서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저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야, 하고 나지막이 말해본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때가 아닌 바로 지금 서로의 앞에 나타났어야만 했다. 인생은, 그리고 인연은 역시 타이밍.



  진짜가 나타났다. 나의 촉은 결국 틀리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에서도 세 번째 만남에서도 그는 나를 충분히 감동시켰고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첫 만남에서 받았던 좋은 느낌들은 밀도 높은 근거와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확실하고 선명해졌다.

  처음으로 늦은 밤 잠들기 전의 통화를 할 때, 그렇게 들뜬 기분을 느껴본 게 언제였나, 마치 연애를 처음 해보는 스무 살처럼, 정신없이 웃고 떠들다 보니 이미 한 시간 넘게 통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쉽게 전화를 끊고 잠을 청할 때 입가에 떠나지 않는 미소와 함께 그 기분 좋은 여운이란. 연애를 시작할 때는 들뜬 만큼,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언제나 조금 더 피곤해지기 마련이지만, 그 ‘기분 좋은 피곤함’은 ‘삶에 치여 그냥 피곤함’과는 근본이 다른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피곤해도 마냥 좋아. 피곤해도 행복하고 즐거워. 그런 말도 안 되는 (약간 광기에 가까운)상태가 연일 지속된다. 분명 통화를 하다 새벽에 잠들고 퇴근 후에도 시간을 쪼개어 만나느라 절대적인 휴식 시간이 줄어드는데도, 몸은 노곤하지만 자주 웃다 보니 그런지 표정에는 생기가 돌고 정신적으로는 기분 좋게 각성된 상태가 된다. 주변인들에게도 조금 더 친절해지는 마법 같은 효과까지. 분명 연애는 좋은 것이다. 씁쓸한 경험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연애를 바라고, 기꺼이 다시 시작하게 되는 이유.


  세 번째 만남 때 우리는 이미 앞으로 계속해서 서로를 알아갈 것임이 분명한 상태였지만, 서로 우리의 관계에 대해 확정 짓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런 말 없이도 확정된 상태이기도 했거니와 상대가 따로 말은 꺼내지 않아도 어른의 만남이란 딱히 '우리 이제 사귀자'라는 수줍은 확언 없이도 자연스레 흘러가는 것이니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나의 이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서, 그는 그날 데이트가 끝나기 전에 내가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귀여운 고백 이벤트를 선사함으로써 우리의 만남이 연인 관계로 이어질 것임을 명쾌하게 확정 지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유명한 스케치북 고백 장면을 재현한 그는 깜짝 이벤트에 잔뜩 즐거워하며 감동한 나에게 '그냥 평범한 마음이 아니라서, 평범하게 만나자는 말로 넘어가는 것 말고, 특별하게 표현하고 특별하게 남고 싶었다'고 했다. 잘생긴 남자가 귀엽기까지 하면 정말 큰일이다. 게다가 자연스러운 이벤트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센스까지 갖췄으니, 정말 큰일이라고밖엔.   


  우리는 자차로 30분 남짓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었다. 내가 이 도시에서 혼자의 삶을 꾸려온 지 6년째, 근거리에 있던 그의 존재를 모른 채 참 많이도 방황했다 싶었다. 각자 지난 몇 년간 혼자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갔는지 대화를 나누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야,'하고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그는 내가 아주 좋아하게 된, 특유의 천천히 번지는 미소를 짓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지금 우리가 만난 게 최적의 타이밍일 수 있어, 이전에 만났다면 네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랑은 다르니까.'하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도 반추해보니,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너무 달라서, 지난 몇 년간 나는 많이도 방황하고 부딪히고 깎이고 개선하고 성숙해졌기에, 과거에 우리가 서로 마주쳤다 하더라도 서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거나 지금처럼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안정감은 들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에 임하는 태도도 불과 몇 달 전의 나와 이 사람을 만나기 직전의 나의 마음가짐이 달랐으니.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안정적인 연애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관계가 안정적으로 진행될 것 같으면 왠지 두려워져서(무엇이 두려웠냐 하면 나는 안정적인 연애의 끝이 '결혼'으로 치닫고 마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어떻게든 상대의 단점과 관계의 맹점을 찾아내려 하기도 했다. 과거의 나는 두려움이 많았고 관계를 시작하고 이어감에 있어 마음가짐이 충분히 여유롭지 못하고 날이 서있었다. 그 모든 과거의 경험을 거쳐 지금의 나는 '이제 내 애정을 마음 놓고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자. 그냥저냥 하는 연애는 이제 내게 없다.'라고 호기로운 다짐을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 운 좋게도 그럴만한 사람이 내 앞에 지금 나타난 것이다.

  시간적인 면에서도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야근을 밥먹듯이 하고 일에 치여 삶에 대한 회의감에 젖어있었고, 1인가구로서의 삶을 효율적이고 지혜롭게 꾸려가는 법을 아직 터득해가는 사회초년생이었다. 그렇게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살아가다 보니 어느덧 나는 세월이 준 경험을 딛고 1인분의 삶을 어떻게든 충분하게 가꿔가는 사람이 되었고, 특히 올해는 직장에서의 포지션도 운 좋게 자리 잡아 야근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내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바쁘고 지칠 수 있는 연말에 그나마 시간적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충분한 시간과 마음을 쏟아 상대방을 알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나의 연인 또한 최근 몇 년까지는 연애 자체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지금과는 달랐으며, 과거 몇 년과 비교했을 때 나를 만나기 직전에 전반적으로 가장 여유로운 시기가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돌아보면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관계를 원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난 몇 년 간 스스로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했다. 발전하고 성장하는 데에 공을 많이 들인 시간이었다고 했다. 확실히 스스로를 갈고닦은 태가 나는 사람이다. 나에게서도 그런 태가 난다면 기쁜 일이다.

  내가 이 도시에 처음 와서 적응해가던 5, 6년 전에는 우리는 더 어렸지만 그만큼 더 서툴고 두려움도 많은 인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외로웠고 그래서 쉽게 연애를 시작하고 쉽게 저버리곤 했다. 외로울 때보다 혼자로서 완전할 때 사람과의 깊은 관계도 더 풍성해진다.

  사람은 변하기 쉽지 않다고들 하지만, 환경이 변하고 계기가 있다면 사람은 변한다. 나도 세월이 흐르고 경험이 다양해짐에 따라 많이도 변했다. 상대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이 우리에게 최적의 타이밍인 것이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 특히나 사람 간의 인연, 연애는 완전히 타이밍의 문제.  

  

  이제는 그다지 멀지 않은 나의 동네와 당신의 동네를 오가는 길이 서로 익숙해질 것이다. 나의 동네도 당신의 동네도 이제 서로에게 익숙한 풍경이 될 것이다. 혼자의 삶을 일구던 각자의 집은 서로에게 조금 낯설고 편안한 공간이 되어갈 것이다. 서로의 차의 조수석이 서로에게 일등석이 될 것이다. 나의 고양이는 당신의 냄새에 익숙해지고 경계를 풀고 당신의 손길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점차 서로에게 익숙해질 것이다. 서로의 일상의 파편들 사이로 보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면모들은 점점 확장되고 선명해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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