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하는 아빠는 항상 비상대기 상태로 비즈니스를 했다. 당시 가게는 우리 집에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우리 집 마당은 창고로 쓰였다. 그래서 언제든 급한 손님이 오면 물건을 꺼내줄 수 있었다. 아니, 할 수 있어야 했다. 장사할 때 이런 종류의 평판은 무척 중요해서 주말에 급한 일이 생겼거나 태풍이 오거나 하는 날은 전화통에 불이 날 정도로 바빴고 그만큼 돈을 벌곤 했다. 다른 집은 안 열어도 저 집은 연다 이렇게 소문이 나면 돌고 돌던 전화가 결국은 우리 집으로 오는 것이었다. 신용카드도 폰뱅킹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손님들이 물건값을 마련하여 상경하면 아빠는 만 원짜리 다발을 까만 비니루 봉다리에 담아 당시 국민학생이던 내 가방에 넣어 집에 보내곤 했다.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는 나름의 노하우였다. 나는 공터 근처에 가방을 던져놓고 놀다 들어가곤 했는데 다행히 가방을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아빠의 일과는 꽤나 단순해서 아침이면 일찍 가게에 가고, 손님들과 대화를 하며 물건을 팔고, 저녁이면 맛있는 것 먹고 그리고 일찍 잠에 들었다. 티비도 드라마도 딱히 영화를 보러 가는 일도 없었고, 새로운 물건에도 - 파는 것이 아니라면 - 관심이 없었다. 내가 중학교를 갈 때까지 우리 집엔 시디플레이어가 없었다. 옷은 때가 잘 안타는 무채색을 주로 입었고 신발은 편한 신발을 신었다. 종종 엄마가 사다주는 멀끔한 옷들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내 차지가 되었다. 아빠가 꽤나 따지는 취향이라곤 쌀과 소고기, 아이스크림이었다. 특히 쌀에 대해선 어딘가의 정해진 논의 쌀의 맛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까다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아빠란 으레 회색의 취향을 가진 심심하고도 담백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처음부터 회색이었다.
어느새 나도 아빠가 되고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어갈 무렵, 한 국제경기에서 한국 야구팀이 결승에 올라갔다. 나는 딱히 스포츠를 보지 않아 관심이 없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지나가는 화면을 얼핏 본 아빠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됐어" 하고 나지막이 내뱉었다.
아주 소박한 흥분과 잠깐의 정적. 나는 정말 그런 모습이 생경해 물었다.
"아빠 야구 봐?"
"젊을 때 봤지"
아빠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별 말이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빠도 젊은 날이 있었고, 나처럼 좋은 옷을 차려입고 영화도 보고 야구도 보러 갔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빠도 젊은 날엔 색깔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고 멋이 있었다.
나도 점점 회색 취향이 되어가며 아빠를 닮아간다. 눈뜨면 나와 일을 하다 저녁이 되면 잠드는 저 달구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