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by 재미나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신뢰>를 읽고,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텅 빈 시간을 견디다 문득 랄프 왈도 에머슨의 문장을 만났다.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이 문장은 타인의 속도에 휘둘리며 ‘완벽이’와 나를 비교하던 조급한 마음을 단숨에 멈춰 세웠다. 숫자의 정답은 통계와 시스템에 있다고 믿었지만, 인생이라는 장부의 정답은 오직 내 안의 ‘자기신뢰’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에머슨은 우리에게 저항할 수 없는 내면의 명령, 즉 ‘극성(Polarity)’을 따르라고 말한다.


나는 왜 남들처럼 편안함을 즐기지 못하고 아침 8시부터 카페에 앉아 장작을 찾는가. 왜 테니스 코트에서 헛스윙을 하며 캄캄한 앞날에 조급해하는가. 그동안 나는 이것을 고쳐야 할 결함이나 온기 없는 성격이라 자책했다. 하지만 에머슨의 시선으로 보면, 이것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고유한 극성이다. 나는 단순히 불안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명령을 따라 깊이 생각하며 나아갈 방향을 선택하는 중일 뿐이다.


우리는 고도가 오지 않는 시간, 혹은 남들보다 늦어지는 시간에 조급함을 느낀다. 하지만 에머슨은 단호하게 말한다. “자연은 감상주의자가 아니다.” 세상은 냉혹하며, 우리를 달래거나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 며칠 만에 터널을 통과하는 내친구 ‘완벽이’들의 환상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다. 오히려 몇 달 동안 젖은 장작을 말리며 불꽃이 파고들 틈을 만드는 나의 지루한 공정이야말로, 냉혹한 현실을 돌파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이제 나는 조급함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내 일상의 주제들을 장부 위에 나란히 펼쳐놓는다.

즐거운 사실의 기술: 다양하게 시도, 의도지 않은 재미, 아침 산책, 고전문학을 읽는 재미, 좋은 사람과 나누는 시간

즐겁지 못한 사실의 기술: 여전히 타인의 성과에 흔들리고, 서툰 나 자신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고통.


이 양극단의 데이터를 솔직하게 기술할 때 비로소 나의 진정한 한계가 드러나고, 정당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나에게 온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온기를 만드는 방식이 남들과 달랐을 뿐이다. 나는 타인의 불꽃을 빌려 쓰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극성을 따라 스스로 화목난로를 지피는 사람이다.

인생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 기하학은 우리의 삶을 잴 수 없다. 오직 자신의 극성을 믿고 묵묵히 걷는 자만이, 그 냉혹한 자연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자기만의 온기를 가질 수 있다.


오늘도 고도는 오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냉정하다. 하지만 나는 내 안의 명령을 믿는다. 늦게 타오르는 만큼 더 길고 단단하게 갈 나의 불꽃을, 그리고 그 불꽃을 피워내기 위해 오늘도 기꺼이 헛스윙을 마다하지 않는 나의 정직한 숙성을.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자연은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 내 안의 ‘극성’을 믿는다는 것.


아래는 책의 내용들을 조금 적어보았다.. 기억에 남기기 위하여.

운명과 자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에게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기하학은 주도적인 사상들의 거대한 궤적을 잴 수 없고, 어떻게 귀결되는지 목격하지 못하며, 사상들 사이의 대립을 화해시키지도 못한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극성을 따를 뿐이다. 이 저항할 수 없는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면 깊이 생각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 첫걸음을 내딛다 보면 우리는 꼼짝달싹할 수 없는 한계를 만난다.

만약 우리가 이 시대를 연구하려 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주제들을 하나씩 꺼내 들고, 그 주제에 관해 즐거운 것을 모두 기술하고, 또 다른 주제에 대해 즐겁지 못한 사실을 모두 기술하면, 진정한 한계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어떤 주제를 한쪽으로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을 바로잡으면 정당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자연은 감상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를 달래지도 않고 비위를 맞추지도 않는다. 우리는 세상이 냉혹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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