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 전공 선택
왜 음악과 다른 전공 학생들은 전공 선택 과목에서 지휘법을 선택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하고 싶은데 먼저,
그러면 왜 지휘법(전공선택)을 선택해야 하는가? 에 대해 말해봐야겠다.
내가 만난 소위 지휘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열에 여덟 아홉은 "멋있어"서 시작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멋있는 것은 옵션이다. 다시 말하면 옵션은 선택사항이고 자동차로 치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장착할 수 있다. 시간과 노력이 드는 만큼 비싸다.
생각해보라 모든 지휘자가 멋있었는지? 아닐걸?
나는 지휘가 멋있다고만 생각했다면 절대 전공으로 선택하지 않았지 싶다.
그야말로 지휘 자체를 옵션으로 생각하고 음악활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의 옵션은 그냥저냥 정도의 선택을 의미한다.
유학 중에 지휘과 입시생들을 만나보면 가끔씩
지휘에 대한 현실과 환상의 비율이 불균형한 상태로 준비하는 경우가 있다.
입학시험이 그렇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런 입시생이 덜컥 합격이 되면 (적어도 내가 보고 경험한 바로는) 그들의 노선은 정해져 있다.
첫 번째 디플롬을 넘지 못하고 휴학인지 귀국인지 행불자가 되거나(국적은 전혀 상관없이 똑같다.)
재학기간 내내 오만한 호기심이 뿜어내는 눈빛과 살짝의 푸념과 매너리즘이 적절히 혼합된 입꼬리(+모양)를 가지고 있다가 졸업할 때쯤 살짝 독기가 빠지지만 장난기와 말수도 적어지고(여기서 되려 착해지는 몇몇 예외적인 아이도 있음) 미소보다 무표정이 많아지며 나에게 말 걸지 말라는 듯한 기운을 내뿜다가 두 번째 디플롬까지 따면 학교도 스승도 두 번 다시 찾아보지 않는다. 그러다 덜컥 취직이 되면 그제야 스승에게 이 부분 어떻게 지휘하면 되냐는 전화질...(나 너무 시니컬해?) 이런 트랙을 밟는다.
서론이 엄청 길었다. 각설하고.
지휘 = 멋짐, 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휘 = 필수,라고 생각한다면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할 거다.
그런데 필수 맞다. 지휘를 전공하는 것은 필수가 아니지만 무조건 알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1. 일단 주어진 세계(스토리, 곡)에 대한 시각을 넓고 크게 가질 수 있다.
내 상황이 지금 비록 좁고 깊은 구덩이에 갇혀있다고 해도
곧 비가 와서 구덩이에 물이 차고 내 몸을 띄울 만큼 비가 와서 그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
내리는 비 없이 구덩이를 더 깊게 혹은 횡으로 파서 다른 길을 찾아서 그곳을 벗어나야 할지를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곳을 왜 벗어나야 하는지 언제까지 있어야 할지까지 알 수 있다.
이해가 되면 모든 것이 쉬워진다.
묶여있던 생각이 풀리고 날숨이 부드럽고 달게 느껴진다.
2.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곳에서부터 이곳으로 와서 어디론가 진행한다.
머무르는 것은 시간의 길이가 존재하는 상태이고 선택의 영역 안에 있다.
그 정지는 한 문장의 마침표일 수도 있고, 악장의 끝 혹은 곡의 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작품에 대한 잠깐의 머무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쇼팽의 많은 작품들은 서로 조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3. 각 파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다.
지휘가 다수의 음악가 앞에서 '지시'하는 모습 때문에 가지는 나름의 다양한 선입견이 있을 텐데,
그것은 지휘라는 결과가 보여'지'는 것일 뿐,
준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을 선행해야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 선행과정은 바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인데,
각 파트를 최선의 노력을 다해 쓰인 대로 노래하고 읽어보며 입장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입장과 입장을 연결하고 여러 입장을 이해해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연주 행위는 개인적 일 수 있으나 음악을 듣는 사람은 항상 타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떤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그냥 집에서 취미 형태로 연습하는 것이 낫다.
내가 하는 행위를 보러 올 수 있지만 나의 그 행위를 위해서는 '작품' 이 있어야 하기에
음악가에게는 사실 (듣기 불편할 수 있지만) 철저히 그 작품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내 것을 잠시 죽이고(줄이고) 다른 것에 이입해서 타인에게 그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에르메스 적 능력이 진짜 프로페셔널 음악가다.
우리가 윤여정 배우님의 수상 소식을 기뻐하고 환호하는 이유와 같다.
그도 역할이라는 것에 내 것을 죽이고 몰입해서 그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우리가 보는 영화나 드라마 안에서의 윤여정이라는 배우는 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지
윤여정 자체가 아니다!
4.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면,
내 삶이 아주 다채로워진다. 연기를 배우지 않아도 연기를 했고,
성우가 아니라도 나는 몇십 명의 목소리를 이미 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간접 경험을 온몸으로 체득! 했기 때문에 책을 몇십 권 읽는 것과 비교할 수도 없이
뇌가 건강해진다. 삶이라는 도로에 가로등이 하나씩 더 켜지는 셈이다.
계속 밝아진다. 내가 밝아지면 그 주변도 밝아지고 헤매는 이까지 일깨워준다.
하지만 지휘가 이토록 추상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말 그대로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멋'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선입견 때문에 접근하고 싶지 않거나
막연히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글쎄, 내가 무명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것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욱 위안이 된다면 누가 손해인가? :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