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불편함
집을 수리하고 리모델링하면서
모아두었던 수많은 이면지들이 자연스레? 사라졌다.
아직도 어떤 물건도 잘 못 버리는 내가
이번 기회를 통해서 버리는 일을 제대로 체험했다.
덕분에 짧은 문장이라도 쓰려면
아이패드나 맥북을 열어야 한다.
아이패드에 메모를 하면 쓸 때는 재미있는데
그 재미난 행위만 충족되고 메모 내용은
더 이상 머리에 남지 않았다.
물론 내용을 외우기 위해서 매번 메모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펜을 통해 전해지는
종이 표면의 작은 요철들,
세로, 대각선, 가로 방향과 각기 다른 눌림의 강도에 따른 조용한 소음들,
가끔씩 잉크가 끊어지는 현상이나
너무 남아 번지는 일도
아이패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너무나 정확히 나타나고
색깔 선택도, 되돌림도 지우기도 너무나 쉽다.
종이 위에서 지워지지 않는 펜 잉크,
버리지 않는 이상 지워지지 않는
그 책임이나 긴장감이 전혀 없다.
나는 40년 동안 종이와 살았고,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고.
아직도 악보에 연필을 애용하고 있다.
하지만 일의 편의를 위한 아이패드와
맥북을 사용하는 나는
이런 '친절한 불편함'이 아직 익숙하지 않다.
이면지는 오랫동안 보관하지 않더라도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이상한 안정감'을 준다.
지우고 수정하지 않고
기록 전체를 들어내 소각하는
엄청난 일을 늘 수행하지만,
이면지는 나에게 편안함을 준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줄도 아는 것 같으면서도
익숙함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아저씨인 것 같다.
친절한 불편함과 이상한 안정감 사이에서
오늘도 균형 잡힌 일상을 잘 살아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