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는 빛나는데, 마음은 불안하다

아무튼, 의료정책

by 김진오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늘 비슷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름이 불릴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 의사에게 들을 말을 마음속으로 미리 정리하는 얼굴들. 그 속에 앉아 있으면, 한국에서 아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사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감기만 걸려도 금세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날 수 있고, 수술이 필요하면 빠른 시간 안에 진행됩니다. 병실이나 수술실 사정이 빠듯할 때도 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입니다. 외국에 사는 친구들에게 들려주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환경이라고 말합니다. 성적표만 보면 한국 의료는 늘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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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의사들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남아 있습니다.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어딘가 불안한 기운이 감돕니다. 지금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지만, 이 구조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싶은 생각. 겉으로는 단단해 보여도 속은 이미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생각해 보면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은 더 오래 살게 되었고, 오래 살수록 아픈 시간도 늘어납니다. 병원에서 필요한 치료는 늘어나고, 그만큼 돈도 더 듭니다. 지금처럼 젊은 세대가 낸 돈으로만 이 모든 부담을 떠안는 방식은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머지않아 월급의 절반이 보험료로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이미 여러 보고서에 숫자로 제시된 미래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동안 외면해 온 어려운 질문에 대해 해결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무엇을 나라가 책임지고, 무엇을 내가 감당해야 할까.


지금처럼 모든 걸 다 보장받을 수는 없습니다. 암이나 심장병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큰 병은 당연히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하지만 감기나 단순한 검사, 꼭 필요하지 않은 고가 치료까지 모두 나라가 부담하는 구조는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듣기엔 불편하지만, 결국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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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병원, 큰 병원만 찾다 보니 늘 붐비고 예약이 밀려 있습니다. 반면 동네 병원은 한산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꼭 나쁜 건 아닙니다. 큰 병원은 중증 환자와 어려운 수술에 집중하고, 가까운 병원은 일상적인 진료를 맡는 구조라면, 환자 입장에서도 훨씬 편리해질 수 있습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의료 자원도 더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 스스로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져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은 비슷한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가벼운 증상에 굳이 비싼 검사를 요구하지 않는 것, 필요 없는 약을 여러 병원에서 반복해서 타지 않는 것, 생활습관을 관리해 병을 예방하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의료 체계 전체를 지탱합니다.


한국 의료의 성적표는 여전히 빛납니다. 그러나 그 빛에만 눈이 머물다 보면 그림자를 놓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적에 안주할지, 아니면 내일을 준비할지는 결국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의료는 멀리 있는 제도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의 삶과 곧바로 이어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찾아올 미래를 두고 막연히 걱정만 할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준비를 시작할 것인가. 그 질문을 우리 각자가 마음속에 품어야 할 때입니다.


글: 뉴헤어성형외과 김진오(대한성형외과의사회 공보이사/대한레이저피부모발학회 학술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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