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의료정책
어렸을 때 검사가 되고 싶었던 꿈이 있었던 탓인지 법을 주제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유난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요즘 즐겨 보고 있는 '에스콰이어'라는 드라마도 그런 이유에서 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특히 최근 방영된 한 화는 제 직업적인 경험과 겹쳐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성범죄자가 갑자기 쓰러지고,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의사가 곧바로 응급조치에 나섭니다. 하지만 환자는 결국 숨을 거두고, 유가족은 “살릴 수 있었는데 일부러 방치했다”며 그 의사를 고소합니다. 게다가 과거에 그 의사가 환자에게 “살 가치가 없다”라고 했던 말까지 문제 삼으면서 사건은 더 무겁게 흘러갑니다. 다행히 변호사가 혈관형 엘러스-단로스 증후군이라는 희귀 질환을 밝혀내면서, 사망은 기저질환 때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사건은 무죄로 마무리됩니다.
시청자들은 당연히 의사가 나서야 하는 장면으로 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 의료인의 입장은 다릅니다. 응급 상황에서 도운 결과가 나쁘게 끝나면, 의도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법적 책임을 지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승객 중 의사가 있으면 도와달라”는 방송이 나오자 아내가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성형외과 전문의인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승무원에게 “저라도 괜찮으면 같이 가보겠다”라고 했습니다. 간단한 조치를 하고 내과 전문의에게 환자를 인계했지만, 돌아와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는 “괜히 나섰다가 잘못되면 네가 책임진다”, “비행기에서는 그냥 자버리는 게 낫다”라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실제로 심폐소생술을 해 환자를 살려냈음에도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한 사례는 의료계에서 낯설지 않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란,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선의로 구조에 나선 사람을 사후적으로 법적 책임에서 보호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 이름은 성경 속에서 전해지는 일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강도에게 맞아 길에 쓰러진 이를 사람들은 외면했지만, 사마리아인은 기꺼이 다가가 돌보았습니다. 여기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낯선 이를 돕는 선의의 상징이 되었고, 그 정신이 법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의 '착한 사마리아인법(Good Samaritan Law)'는 구조자가 혹시라도 불완전한 결과를 맞더라도 법적 책임을 면하도록 분명히 규정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의 2에서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의료인들이 체감하기에는 여전히 불안이 큽니다.
실제 판례는 이런 현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응급 소아환자를 수술한 외과 교수가 소아외과 전문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10억 원을 배상하라는 항소심 판결을 받은 사건이 있었고, 응급환자를 살려냈음에도 기록상 문제로 의료진에게 수억 원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선의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과가 기대만큼 좋지 않거나 형식적인 흠결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의료인들로 하여금 응급 상황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만듭니다.
'에스콰이어'의 장면은 시청자에게는 응급 상황에서 의사가 당연히 나서야 하는 모습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료인에게는 결과가 좋지 않아도 법정에 설 수 있다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늘 반복되는 고민이었습니다. 돕지 않아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도왔다가도 법정에 설 수 있는 이 모순 앞에서, 법과 제도는 이제 선의를 지키는 쪽으로 더 분명히 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선의를 내민 손이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옆자리에 누군가 쓰러졌을 때, 선의를 실천하고도 법정에 서야 할 수 있는 현실을 안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과연 손을 내밀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런 손을 어떻게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글: 뉴헤어성형외과 김진오(대한성형외과의사회 공보이사)
P.S. 드라마적 효과를 위해 현실과는 다른 장면들도 있었습니다. 알고도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1. 희귀 질환에 대해서 자료를 찾겠다며 검사들이 밤새 종이 논문 더미를 뒤적이는 모습은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습니다. 실제라면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면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정채연 씨가 ‘어 찾았다’ 하면서 논문 인쇄본을 쌓인 파일에서 꺼냈을 때를 위한 빌드업이었겠죠. 정채연 씨는 물론 밤을 새웠어도 미인이었지만.
2. 검사가 돌아서는 정채연 씨에게 참고하라며 필살기처럼 집어 준 책이 사실은 그냥 쉽게 구할 수 있는 쉬운 기초 서적 같았다는 점.
3. 변호사들이 희귀 병에 대해서 알아본다며 밤새가며 한참 의학 공부를 하다가 결국 뒤늦게 의사 친구를 불러 조언을 받는 설정 역시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죠. 실제 상황이라면 처음부터 전문적으로 자문이 이뤄졌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적 긴장을 높이려는 장치로 이해할 수 있고, 의료인의 눈에는 작은 옥에 티처럼 가볍게 웃음을 주는 대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