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이버보다 배한성 성우 목소리가 더 진짜 같았던 이유

인생에 덮이는 더빙

by 김진오

1983년, TV 화면 한구석에 '음성다중'이라는 생경한 글자가 떴다. 리모컨이나 TV 본체에 달린 묵직한 단추를 눌러 늘 듣던 성우의 목소리를 지워내면, 지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외국 배우의 날것 그대로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닫혀 있던 창문을 열어젖히고 처음 보는 바깥바람을 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소리는 들리는데 뜻을 알 길이 없었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화면에 자막이 깔리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영어로 쏟아지는 원음은 그저 근사한 소음일 뿐이었다. 외국 배우가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신비함도 잠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밀려오면 우리는 금세 다시 친절한 우리말 더빙으로 채널을 돌렸다.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진짜’의 세계는 예상보다 불친절하고 막막했다.


게다가 막상 마주한 ‘원본’의 실체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우리는 성우 배한성의 능청스럽고 재치 있는 목소리를 통해 맥가이버라는 인물을 완성해 왔다. 그 목소리는 주인공의 천재적인 지능과 여유로운 유머 감각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그런데 음성다중 버튼을 눌러 만난 실제 배우 리처드 딘 앤더슨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가늘고 건조하고 때로는 맥 빠질 정도로 평범하게 들렸다. 원형의 진실이 주는 감흥보다 정성껏 가공된 ‘가짜’가 주는 만족도가 훨씬 높았던 거다. 음성다중 기능은 한때의 유행처럼 거실을 스쳐 지나갔고, 나도 역시 금세 그 기능을 잊은 채 다시 평범한 시청자로 돌아갔다.


맥가이버 음성다중 배한성 (2).png


흔히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모습만이 언제나 숭고하고 아름다울 것이라 믿지만, 때로는 정성껏 입혀진 ‘더빙’이 원본보다 더 그 본질을 잘 드러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성우들은 단순히 입 모양을 맞추는 작업을 넘어서, 그 인물이 처한 상황과 감정의 핵심을 추려내어 가장 선명한 색채로 다시 그려낸다. 그것은 대상의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감정을 기꺼이 투영하는 고도의 재해석이자 배려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정제된 언어를 골라 사용하는 과정은 언뜻 ‘진짜 나’를 가리는 위선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혹은 신뢰받는 동료가 되기 위해 스스로 입히는 그 세련된 목소리들이야말로 어쩌면 투박한 원형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 애쓴 흔적이다. 맥가이버의 원음보다 배한성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었듯, 우리 삶의 진실 또한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 날것의 상태보다는 타인을 향해 정성껏 다듬어낸 모습 속에 더 선명하게 깃들어 있을 때가 많다.


음성다중 기능이 금세 시들해졌던 것은 우리가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낯설고 불친절한 원음보다는, 나를 위해 세심하게 조율된 따뜻한 목소리에 마음을 여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삶이 늘 ‘진짜’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더 멋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목소리 톤을 가다듬고 가장 근사한 단어를 골라 대사를 읊는 그 ‘더빙된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거실에서 배한성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행복했던 소년의 마음처럼, 우리는 그 정제된 다정함 덕분에 차가운 세상을 조금 더 따스하게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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