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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Feb 06. 2024

엄마를 살리기 위해 모든 걸 다했다고 믿을 수밖에

죽음 앞에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엄마를 6년이나 치료해 준 교수님에 대한 원망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다. 다발골수종은 이미 치료법이 규격화되어 있어 어느 병원에 가도 대부분 같은 방식으로 치료한다고 하니 치료법에 대한 의구심 때문은 아니다. 또 매번 몇 시간이고 지연되어 끝도 없이 대기해야 하는 외래진료도, 그 끝에 만난 교수님과 단 3분 정도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것도 모든 대학병원에서 늘 발생하는 일이니 그것 때문도 아니다.


교수님은 최선을 다해주셨다. 내가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교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바로 그 점이 원망스럽다. 교수님은 엄마를 좀 더 빨리 포기하셨어야 했다.

환자와 가족은 모른다. 우리가 가느다란 가능성을 붙들고 불안감을 숨긴 채 서로를 응원하며 억지로 돌려대는 이 희망회로를 정확히 언제 멈춰야 할지. 교수님이 먼저 우리를 내쳐주셔야 했다.




평일 아침 8-10시 사이에 교수님의 회진이 시작된다. 교수님의 스케줄에 따라 갑자기 변동되기도 하지만 보통 그렇다. 매일 아침 8-10시 사이 갑자기 '30분 뒤 교수님의 회진이 시작된다'는 메시지가 온다. 우리 집에서 엄마 병원까지는 대중교통으로 1시간 30분. 메시지를 받고 출발하면 영원히 교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교수님을 만나고 싶으면 아침 6시 반에 집을 떠난다. 교수님은 7시 58분에 오시기도, 10시 32분에 오시기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교수님은 놀다 오시는 게 아니다. 만나야 할 환자가 끝도 없이 많고 그 외 여러 복잡한 일들을 맡고 계신 걸 알고 있기에 환자가족이 교수님께 맞추는 건 당연한 것이다.


기다림 끝에 교수님이 오신다.

"좀 어떠세요?"

엄마는 이상하게도 섬망이 심해 하루종일 헛소리를 하다가도, 잠에 취해 몇 시간이고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다가도 교수님이 회진만 오시면 벌떡 앉아 정상인처럼 군다. 그리고 하루도 안 빠지고 이렇게 대답한다.

"아유 괜찮아요. 별로 안 아파요. 저 좀 퇴원시켜 주세요."


나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교수님이 엄마가 괜찮다고 오해해서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을까 봐 바보같이 마음이 급해서 엄마 말을 잘라먹는다.

"아니에요. 어제도 식은땀 흘리면서 잠도 못 주무셨고, 섬망이 심해져서 헛것도 자주 보세요."


할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너무 많다. 교수님을 붙잡고 내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수많은 질문을 하고 싶다.

교수님은 수치가 안 좋아진다, 항암이 잘 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부정적인 얘기를 언제나처럼 아주 담백한 목소리로 말씀하신 후에

"그래도 힘내봐야죠. 한 번 해봐야죠. 이 약이 안 들으면 이런 약도 있으니까요." 하고 웃으며 떠나신다.


나는 교수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싶다. 지금 말씀하신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내가 이해하지 못한 그 어려운 의학용어를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는 없는지, 엄마가 계속 치료를 하면 나아질 가능성을 몇 프로로 보시는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치료를 멈추고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지, 교수님의 가족이라면 어떤 결정을 하실 건지 직접적으로 묻고 싶다.

하지만 교수님은 언제나처럼 바쁘시고 어차피 돌아올 답을 나는 잘 안다.


'환자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다' '다음약이 잘 듣는지는 약을 써봐야 안다' '현재로선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헛된 희망을 갖게 할 수도, 그렇다고 진흙 같은 절망 속에 빠지게 할 수도 없어 내뱉는 두루뭉술한 말들...

내가 의료진이어도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간병인 이모가 새로 오셔서 엄마를 보고 온 게 바로 전날인데 병원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엄마의 상태가 하루 만에 심각하게 안 좋아져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중환자실에 간 이후로는 기도 삽관이나 심폐소생술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들은 연명치료의 일환이니 가족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일단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엄마에게 갔다.

간병인 이모께서는 엄마가 어제 낮부터 꼬박 하루가 넘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다. 엄마는 숨을 헐떡이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엄마.."


엄마는 지금 대체 어디쯤 있는 걸까. 끝없이 깊고 어두운 터널 속을 혼자 헤매고 있는 것일까?

저 깊은 심연에서 제발 엄마를 꺼내줄 수만 있다면..

내 남은 목숨을 나누어 줘서라도 엄마를 살릴 수 있다면..

엄마 제발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엄마가 아픈 이후로 나는 항상 웃었다. 엄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인 줄 알기 때문에 내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줄 안다. 그러니 나는 엄마에게 항상 괜찮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치료하면 낫는다고,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엄마 오늘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금방이라도 나을 것 같다고, 우리 애들 시집장가가는 것까지 보겠다고, 이번에 퇴원하면 해외여행을 가자고.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랬던 내 입에서 결국엔 이 말이 나왔다.


"엄마.. 내가 어떻게 해줄까? 이젠 엄마를 놓아줄까? 엄마 이제 쉬고 싶어? 엄마 편안하게 해 줄까? 엄마 제발 아무 말이라도 해줘."


거짓말처럼 엄마가 눈을 번쩍 떴다. 자꾸 탈출하려고 해서 결박해 놓은 몸을 비틀며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이 막혀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온몸을 버둥거리며 입을 뻐끔거렸으나 무언가에 콱 막힌 듯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껴안았다.


"알겠어 엄마. 다 알겠어. 우리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쉬자. 응? 엄마 푹 쉬자. 우리 이제 집에 가자. 알겠지?"


엄마는 그제야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간호사들이 달려왔고 엄마는 곧 중환자실로 실려갔다. 엄마를 중환자실에 보내고 교수님 면담을 위해서 또 오랜 대기를 했다.

대기실에 눕듯이 앉아 허공만 바라봤다. 머리가 멍했다. 바로 어제까지도 횡설수설하긴 했어도 말은 할 수 있었고 조금은 웃었는데.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악화되기도 하는 건가?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무서웠다. 엄마의 병은 끝을 모르고 커지더니 어느새 집채만큼 덩치를 키워 나를 겁줬다.


우리 삼 남매는 교수님 면담을 하기 전 호스피스 담당 간호사를 만났고 교수님 밑에 있는 다른 젊은 의사도 만났다. 두 분 다 엄마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수님의 의견이라고 했다.


.. 정말?

정말 제일 중요한 게 교수님의 의견인가?

어지럽고 헷갈렸다. 이제 이지경까지 왔으면 교수님도 더 이상 희망을 줄 수는 없으시겠지.

중환자 면담실에 앉아 교수님을 기다리며 나와 동생은 호스피스의 여러 방법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긴 기다림 끝 교수님이 나오셔서 평소처럼 가볍게 말씀하셨다.

"일단 의식을 찾는 게 우선이니 의식을 좀 찾고 다시 치료를 해보죠."


.. 뭐???

이게 뭐지? 이게 대체 뭐지? 엄마가 지금 위독하고 심각한 상황이 아닌 건가? 별 상황 아닌데 우리가 오버하고 겁먹은 건가? 다시 치료를 할 수가 있는 건가?


"호스피스에 가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호스피스에 갑니까. 의식이 돌아와야 호스피스를 가든 항암을 다시 해보든 하지요."

"갑자기 왜 의식을 잃으신 건데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뇌까지 번진 종양 때문일 수도 있고 혈액이 막혀서.. (중략) 무엇보다 가장 큰 가능성은 병의 진행이죠. 병이 상당히 진행돼서 그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며 줄줄 흐르던 눈물이 갑자기 말라버렸다.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같은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제발 누구라도 이 상황을 멈춰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병이 그렇게까지 진행됐다면... 돌아가실 것 같지 않은가요? 선생님 제발 명확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희는 아무것도 몰라요. 선생님께서는 데이터가 있으시잖아요. 선생님께서 이런 환자들을 많이 보셨을 거잖아요."


"솔직히 아주 좋은 상황은 아니에요.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고 할 수도 있죠. 하지만 낭떠러지는 아니란 말이에요."


교수님은 늘 그렇듯 급한 일이 있으신 모양이었다. 의자를 양손으로 붙잡고 계셨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반동의 힘을 이용하여 미사일처럼 튀어나가실 것만 같았다.


"그럼 지금은 포기할 때가 아닌 건가요?"

"저는 포기 안 했습니다. 가족 여러분들은 포기하실 건가요?"

"아니요!!! 저희는 교수님이 포기 안 하시면 포기 못하죠... 제발 고쳐주시기만 하면 어떤 치료든 다 해볼게요."

"네. 그럼 해봅시다."


마지막 말을 마치 역시나 교수님께서는 경주마처럼 튀어나가셨다. 나와 동생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다 대책 없이 또 희망을 갖고야 말았다.


아! 우리가 너무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구나. 중환자실까지 왔지만 이것도 치료의 과정이겠구나. 여기서 잘 치료하여 일반실로 올라와서 다시 항암을 해보는 거구나. 치료가 너무 힘들어 엄마가 잠깐 의식을 잃으셨구나.

엄마에게 아직 희망이 있구나!!!!


그런 등신 같은 생각을 했다.

그날이 엄마가 눈을 뜬 마지막 날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엄마 명의로 되어 있던 아빠의 사업을 정리하느라 회계사를 만난 적이 있다. 회사일을 6년 넘게 맡아 주셨지만 실제로 얼굴을 볼 필요는 없어서 처음 세무일을 맡기기로 계약한 날을 제외하고는 처음 본 것이다. 그분은 회계법인의 대표시고 평소에 일은 그 회사의 세무사들과 했으므로 서로의 근황도 전혀 몰랐다.


사무실 1층 카페에서 만나 여러 일들을 상의하고 헤어지기 전 자연스럽게 고인의 죽음을 위로하는 말을 나눴다.

"어쩌다가 그렇게.."

"혈액암이셨어요. 재발한 뒤로는 항암이 잘 안 돼서 급격하게 나빠지다가 결국 돌아가셨어요."

형식적인 질문이었고 수없이 했던 말을 대답으로 내놓았다.


회계사님은 잠시 말씀이 없으셨다.

"혈액암이시라고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는 말씀하셨다.

"저희 와이프가 작년에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우리는 서로가 초면에 가까운 구면이라는 사실과 20년이 넘게 나이차가 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1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혈액암이 얼마나 힘든 병인지, 어떤 약을 써왔는지, 마지막으로 떠나는 모습이 어땠는지, 그걸 지켜보는 가족의 괴로움에 대해서도.


"저희 담당 교수님은 끝까지 엄마를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마지막에 입원할 때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셨는데 그 뒤로 3개월이 넘게 입원하셨고 그대로 집에 돌아오지도 못한 채 병원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때 병원 입원이 아니라 교수님께서 저희를 호스피스로 보내셨으면 어떠셨을까 아직도 상상해요. 그럼 엄마가 만나고 싶어 하던 모든 가족들과 여유롭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되지 않는 치료를 하느라 극심한 고통을 겪지도 않았을 거고 무엇보다 중환자실에서 혼자 외롭게 돌아가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저랑 완전히 반대시네요. 저희 교수님은 저희한테 호스피스를 권하셨어요. 저는 아직 이렇게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데 무슨 호스피스냐고 반대했죠. 교수님은 가망이 없다고 하셨어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서 퇴원할 수 없다고 난동을 부렸어요. 그래도 치료해 주실 수 없다고 해서 쫓겨나듯 다른 병원으로 옮겼어요. 결국 같은 말을 들었지만요. 그렇게 가정호스피스를 했어요. 죽어가는 걸 지켜보는 건 정말 지옥 같은 일이었어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복잡했다. 결국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인 걸까? 나는 호스피스를 아쉬워하고 회계사님은 마지막까지 더 적극적인 치료를 아쉬워했다.

우리 교수님이 엄마를 호스피스에 보내지 않은 것은 교수님이 본 치료가능성, 당시 상황의 심각성, 엄마의 체력, 교수님이 가지신 가치관 등이 섞여서 만든 결과다. 회계사님의 교수님 역시 마찬가지다.


그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을 돌린다면 교수님께 더 이상 치료 안 한다고 호스피스 가서 편안하게 마무리할 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 같지만 그것도 결국 이런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일 뿐 아무것도 모른 채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런 무모한 결정은 아마 못 할 것이다.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호스피스에서 단 며칠 만에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 그럼 그 죄책감은 어쩔 것인가.

'치료를 더 했다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에 괴로워할 게 눈에 훤하다.

교수님이 치료를 더 해라, 호스피스로 가라 결정을 해주시니 가족들의 부담도 덜어지는 거였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고, 지금 이 결정이 모두에게 최선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죄책감도 후회도 이제는 다 내려놓고 그때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했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의 일들은 전부 내 손을 벗어났다고.

이미 끝이 정해진 엄마의 운명이 엄마를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이끌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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