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병은 치매다. 이 글을 보는 분들 중 치매환자 가족이 있다면 정말로 깊은 위로를 전한다. 얼마나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울지 건방지겠지만 나도 조금은 안다.
엄마는 투병 생활을 하며 종종 입원을 했다. 입원해서 항암을 할 때도 있고 혈액암이라는 게 종양만 딱 떼어내 버리면 되는 병이 아니라 여기저기 함께 고장이 나기 때문에 간 때문에, 혈압 때문에, 뼈 때문에 우리는 잦은 입원을 했다. 병동에는 암 환자뿐 아니라 다양한 병명을 가진 사람들이 입원을 하는데 치매 환자를 보는 일은 많지 않다. 치매 환자들은 보통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으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보는 치매환자들은 대부분 치매와 함께 암이나 골절이 있는 환자라 잠시 치료를 받으러 오신 분들이다.엄마는 2019년에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을 한 후 무균실에 있다가 일반실로 왔는데 그때 앞자리에 계신 할머니가 골절과 치매가 함께 있는 분이셨다.할머니는 정말 1분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셨다.욕이 얼마나 저질스러운지 살다 살다 그렇게 천박하고 외설적인 욕은 처음 들어보았다.할머니의 자식들과 손주들은 병동 여기저기 사과하러 다니기 바쁘셨다.
"정말로 저런 분이 아니신데. 욕 한마디 할 줄 모르시는 분이셨어요. 한평생 참고 사셔서 마음에 남은 한이 너무 많으신가 봐요. 정말 소녀같이 아름다운 분이셨는데.."
할머니의 딸은 매번 사과하며 눈물을 흘리셨는데 그분의 눈물을 볼 때마다 민망함과 죄송함, 또 본인의 원래 엄마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서러움의 눈물이겠거니 상상하면 나까지 서글퍼지곤 했다. 밤새 잠을 자지 않고 욕을 하시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격리되셔서 갑자기 못 보게 되었지만.
그때 엄마랑 나는 구운 달걀을 까먹으며
"엄마 치매 진짜 무섭다. 그렇지? 자식들도 너무 슬플 것 같아."
"그러니까. 에이구. 할머니 밤새 소리 지르시더니 어디로 가셨나."
하고 다른 세상 사람들 얘기하듯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4년 뒤인 2022년, 엄마의 암이 재발했다.항암은 계속해서 실패했고 엄마의 모든 수치는 나빠져만 갔다.혈압은 떨어졌고 신장과 간수치가 모두 좋지 않아서 하루가 다르게 퉁퉁 부어갔다. 이전 암 진행 중엔 볼 수 없던 혹덩어리들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등에 있던 혹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엄마는 누울 수 없어서 앉아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자 엄마는 자주 쓰러졌다. 병의 진행속도가 빠르므로 집에서 치료하기 어렵다고 판단돼 입원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병원생활이 한 달이 넘어가던 어느 날, 언니가 와서 1층 카페에서 셋이 커피를 마셨다. 그즈음 엄마가 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엄마는 그날따라 유독 횡설수설했다.우리는 카페가 시끄러워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나 싶었다.
"그래서 종섭이는 언제 온대? 오고 있다고 했지?"
"막내외삼촌? 외삼촌은 일하고 있지. 엄마 오늘은 평일이잖아."
"오늘이 평일이야? 오늘이.. 그러니까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그런데 너네는 밤이 되도록 왜 여기 있는 거야."
"이렇게 해가 쨍쨍한데? 왜 이러셔. 노망이 났나 봐~~~ 이제 들어가서 쉬자."
우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엄마를 일으켰다.
뒤돌아서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터덜터덜 걷는 엄마의 뒷모습을 황망히 보고 있던 언니가 황급히 달려가 카디건을 풀어 허리에 묶어주었다.
엄마가 대변을 지린 것이다. 엄마 뒤처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마주 앉았다.
"... 치매가 왔나 봐."
"그런가 봐. 치매도 왔나 봐."
그리고는 또 눈물. 눈물 마를 날이 없는 하루하루였다. 매일같이 새로운 상황들이 생겼고 익숙해질 만하면 또 다른 문제들이 터졌으니까.
다음날 회진시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의사 선생님이 오시자 어제 있었던 상황을 말하고 뇌를 찍어보기로 했다. 며칠 뒤 나온 결과를 보니 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뇌에는 문제가 없는데 하루아침에 치매 환자처럼 되는 것이 '섬망'이다. 암환자 카페나 블로그를 보다 보면 투병 중 섬망으로 고생하는 환자와 가족이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장소나 시간에 대한 인지능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비교적 최근 기억들을 잃어버린다. 치매와 다른 점은 이러한 증상이 일시적이고 문제상황이 해결되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간다. 선생님께서는 지루한 병원 생활을 오래 하면 섬망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어쩌면 항암약이 독한 것이 이유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늘 그렇듯 명확한 것은 없다.우리는 또 우리의 방식대로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한다.
엄마는 자주 허공을 보고 입을 벌리고 앉아있다.웃으며 엄마 입을 꾹 닫아주고 침을 닦아준다.
"심심하지 않아? 뭘 보고 있어?"
"응? 아무것도 안 보고 있어. 밤에 여기와 있으면 어떡해. 애들은 어떡하구."
"걱정하지 마 엄마. 지금 낮이야."
나는 웃으며 커튼을 열고 해가 떠있는 창 밖을 보여준다.
섬망이 있는 환자에게는 시계를 자주 보여주고 지금 시간과 장소등을 상기시켜 주면 좋다. 익숙한 얼굴이 옆에 함께 있어주는 것이 좋고 어떤 식으로든 갑자기 환경의 변화를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환자가 헛소리를 하거나 헛것을 볼 때 가족이 겁을 먹고 왜 그러냐고 다그치는 게 가장 나쁜 대응이다.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몰라서 가장 불안한 것은 환자 본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땀에 절은 엄마의 양말을 벗기고 발을 씻겨준다.아무리 찾아봐도 갈아 신길 새양말이 없다.
"엄마. 양말 어딨어?"
"으응? 양말 여기."
엄마가 서랍을 뒤져 나에게 믹스커피 두 봉을 내준다.
"오. 멋진 양말. 신어 봐 신어 봐."
믹스커피를 엄마 발에 갖다 대며 웃는 나를 보고 엄마가 영문을 모르고 따라 웃는다.
"엄마 입 심심할까 봐 뻥튀기 가져왔어. 이것 좀 먹어."
"응. 찰옥수수네. 달달하고 맛있다. 찰옥수수가 제철인가 봐."
"아, 찰옥수수면 어떠하리~~ 뻥튀기면 어떠하리~~~"
엄마는 노래하는 나를 보고 또 웃는다.
중간 정산을 하러 잠시 원무과에 다녀온 사이 엄마는 창문을 바라보고 서 있다.
창문에 비친 엄마는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엄마를 부르려는 순간조용히 노래하듯 말했다.
"은유야~ 은호야~ 뭐하니 놀자~~"
엄마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두 명의 이름. 내 아기들의 이름.
나는 숨죽여 잠시동안 울고 재빨리 눈물을 닦고 운 티를 지워낸다.
"아가들하고 놀고 싶어? 그럼 얼른 나아야지!"
엄마는 구겨진 검정비닐봉지를 보고도 키득키득 웃으며
"저기 은유가 쪼그려 앉아있는 것 좀 봐. 쟤 정말 왜 그런대니" 했다.
엄마 물건을 보관해 놓은 캐비닛을 바라보다가 심각한 얼굴로말했다.
"은호가 저 안에 들어있어. 얼른 꺼내줘. 숨바꼭질을 하다 들어가 버렸나 봐. 어떡하지."
사랑스럽고 귀여운 나의 엄마. 아기가 되어버린 우리 엄마. 이런 모습으로라도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주길 기도했었다.
오랜 병원 생활로 인해 생긴 섬망은 보통 익숙한 공간인 집으로 돌아가면 호전된다고 했지만 엄마의 섬망은 심각해지기만 했다. 그 이후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 데나 똥을 쌌고 침대에서 탈출하려다가 굴러 떨어져 결박당하고 그런 엄마를 도우려는 우리에게 화를 내고 개새끼들이라고 욕을 했다.
엄마는 매일 엄마답지 않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엄마에게 우리가 지쳐버리고 미워지기도 전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너무 엄마다워서 황당했다.
엄마를 감당하기가 너무 지쳐서 엄마만 없으면 조금은 쉴 수 있겠다는 모나고 못된 마음이 생길 때쯤 가버렸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엄마는 내가 지치기도 전에, 엄마를 미워하기도 전에 황급하게 나를 떠났다.
평생 엄마를 잊지 못하게 하려는 큰 그림일까?
아니면 살면서 우리에게 상처 한 번, 피해 한 번 주지 않더니 끝까지 그런엄마의 모습을 유지하고 싶었던 궁극의 의지였을까?
나는 오랜 간병을 하는 치매환자 가족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조금은' 안다고 말했던 것이다. 나도 이 과정이 길었으면 지금같이 애틋하기만 하고 슬프기만 하진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겐 6년이라는 투병 시간은 너무 짧았고 그중 고생했던 기억은 6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아쉽고 서럽고 노인이 되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엄마가 그저 불쌍하기만 하다.